[※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물은 생명의 숨결이자, 존재의 근원이다.
인간은 물 없이 하루도 온전히 살 수 없다. 그 가운데, 오랫동안 우리 곁을 지켜온 녹차가 있다. 해마다 4월이면 햇살과 바람을 머금은 연둣빛 찻잎이 수확된다.
녹차만의 풍미를 품은 채 한 잔의 따스함으로 다시 태어난다. 최근 미국의 의사이자 작가인 윌리엄 리 박사는 104세까지 장수한 자기 종조부의 비결이 녹차 마시기였다고 밝혔다.
녹차에는 고유한 성분인 테아닌이 타닌 성분과 함께 균형 있게 함유돼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낸다. 또한 트레오닌, 아스파라긴산, 라이신, 글루탐산 등 풍미에 중요한 필수 아미노산이 다량 들어 있다.
비타민 B₁, B₂, 니아신 등은 식욕을 돋우고 신경계 기능을 유지해 성장 촉진에도 도움을 준다. 녹차 속 미네랄 성분은 훌륭한 알칼리성이라 몸의 산성화를 막고 식생활의 균형을 돕는다. 또한 카페인은 타닌과 어우러져 특유의 쓴맛과 떫은맛을 낸다. 또한 각성 작용을 통해 머리를 맑게 한다.
이처럼 녹차에는 카테킨, 비타민, 미네랄 등 유익한 성분이 가득해 노화를 억제하고 면역을 돕는다. 녹차 한 잔이 몸을 정화하듯 물은 인체의 대사, 체온 조절, 독소 배출 등 생물학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없어선 안 될 존재다.
녹차가 그렇듯, 좋은 물은 우리 몸 구석구석을 순환하며 생명의 시스템을 조용하면서 확고히 지탱한다. 삶이 번잡하고 복잡할수록, 한 잔의 물, 한 잔의 차는 우리가 잊고 있던 본질로 조용히 데려다준다.
필자는 과거에 무산 스님에게서 한국의 차에 대해 배우며 다도와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을 공부했다. 또한 신라시대의 화랑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전설이 깃든 울산의 차 재배지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후 무산 스님께서는 정곡이란 호로 '중원의 차'라는 책을 펴내셨다. 동다송은 한국 차의 재배와 차를 만드는 방법인 제다를 비롯해 이론과 실천을 집대성한 이론이다. 다도의 큰 틀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초의선사(1786~1866·조선 후기의 선승<(禪僧>으로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 발전시킴)는 다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차를 따는 데 그 묘(妙)를 다하고, 만드는 데 그 정(精)을 다하고, 물은 진수(眞水)를 얻고, 끓임에 있어서 중정(中正)을 얻으면, 체(體)와 신(神)이 서로 어울려 건실(健實)함과 신령(神靈)함이 어우러진다. 이에 이르면 다도는 다했다고 할 것이다."
이 무렵부터 '다도'(茶道)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중국에서 만난 재스민차
필자는 지난 1995년 중국에서 쓰촨성의 차 전문가 쉬진화(徐金華) 선생을 만나게 됐다. 선생으로부터 '푸른 호수에 날리는 눈'이라는 뜻의 재스민 녹차 '벽담표설'(碧潭飄雪)로 잘 알려진 서공차(徐公茶)의 제작법을 배웠다.
필자는 또한 선생으로부터 도가(道家)의 차도(茶道)와 차례(茶禮)도 수학했다. 지금도 선생은 신진서공차문화연구소(新津徐公茶文化硏究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재스민차(茉莉花茶)에 향을 입히는 기법은 명나라 시대 대문호 서위(徐渭)가 시작했다. 이것을 나의 스승인 쉬진화 선생이 1971년부터 연구해 오늘날의 서공차(徐公茶)로 발전시켰다.
재스민차는 청열해독(淸熱解毒·몸에 열이 많아 발생하는 각종 염증을 내려줌), 이기안신(利氣安神·스트레스·불안·우울 등을 제거해 마음을 안정시킴), 항균소염(抗菌消炎·각종 바이러스성 염증을 제거)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편의상 중국어 원어를 살렸다.
재스민차를 만드는 방법은 3∼4월 사이의 처음 나는 어리고 고운 잎을 손으로 따서 약 160∼180℃의 온도로 빠르게 가열해 효소 활성을 멈추게 한다. 이후 손으로 찻잎을 부드럽게 비벼 차향을 더욱 진하게 끌어내는 유념을 하고 저온 열풍으로 수분을 제거해 보관한다.
재스민꽃(茉莉花)은 6∼8월 사이 저녁 무렵 아직 완전히 피지 않은 반개화 상태의 꽃을 수확해 4∼6시간 상온 보관 후 완전히 개화되도록 한다. 이렇게 준비한 꽃으로 차에 향을 입히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
녹차 3㎏에 재스민 1㎏의 비율로 섞어 약 30℃, 습도 60%의 온실에서 12시간 정도 보관한다. 그런 다음 향을 입히고 난 후 꽃을 제거하고 찻잎은 열기와 습기를 제거한다. 이 과정을 총 7회 반복하고 마지막 7번째에서는 꽃의 약 10% 정도를 남긴 채 약 40℃로 저온 건조해 마무리한다.
이렇게 완성된 차의 특징은 은은한 재스민 향이 풍기며, 연한 황록색을 띠고, 맛은 부드럽고 깔끔하며 은근한 단맛이 감돈다. 이처럼 차는 역사와 철학, 정성이 깃든 문화의 결정체다.
◇ 손자병법으로 본 녹차 가루 활용법
손자병법 '시계(始計)의 장'에서 손자는 전쟁이 나라의 중대한 일이라 백성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으니 반드시 깊이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녹차 가루인 말차를 활용해 만들 수 있는 우리 음식의 가장 기본인 밥, 전, 국수, 떡, 튀김 등으로 비유해 봤다. 쉬운 예로 녹차 칼국수는 면발의 질감을 맞추기 위해 온도와 숙성 시간을 세심하게 조절해야 한다. 이는 손자가 말한 모든 승리는 철저한 준비에서 나온다는 철학의 구현이다.
먼저 손자는 도(道)의 길이야말로 백성이 윗사람과 뜻을 함께해 생사를 같이하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라고 했다. 녹차 밥은 말차가 밥에 스며들게 해 재료가 하나로 어우러진 가장 기본적이고도 조화로운 음식이다. 백성과 군주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말차와 쌀이 완전히 어울려 조화로운 맛을 내는 이 음식은 도(道)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손자는 이어 천(天)이 날씨, 계절, 자연의 흐름도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타이밍과 환경 파악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녹차 전을 만들 때는 제철 채소와 기후에 맞는 재료를 골라야 제대로 된 효능과 맛이 난다. 특히 쑥이나 냉이처럼 봄에 나는 식재료를 말차와 함께 사용하면 향도 풍부해지고 자연의 흐름을 담은 음식이 된다.
전투에 앞서 하늘을 따르는 전략과 같이 녹차 전의 배합에서도 계절의 흐름을 읽는 감각이 핵심이다.
지(地)에 대해서는 땅을 이해해야 이긴다고 했다. 전투가 벌어질 장소의 조건, 거리, 지형, 이동 경로 등을 면밀히 파악해야 유리한 전투를 이끌 수 있다. 칼국수는 국물, 면, 고명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효능과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 또한 면의 탄력, 육수의 밀도, 고명 재료의 양까지 고려해야 전체가 조화롭다. 전장의 '지형'처럼 음식에서도 배치가 결정적인 요소다.
장(將)에 관해서는 훌륭한 지휘관이 전쟁을 이끈다고 했다. 지휘관은 전략적 판단력뿐 아니라 인간적인 신뢰와 감정 통제력까지 갖춰야 한다. 녹차 떡은 절제된 단맛과 섬세한 말차 향의 균형이 중요한 음식이다. 차분함과 깊이를 요구하는 이 음식은 지휘관의 성품과 닮았다. 지혜롭게 조율하고, 절제된 맛을 통해 효능과 감동을 주는 녹차 떡은 장(將)의 미덕을 담은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손자는 또 조직과 제도가 전쟁의 틀임을 강조하며 법(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제도와 규율, 병력의 운용 방식 등 전쟁의 시스템과 관리 능력이 승패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녹차 표고버섯튀김은 말차 튀김옷과 버섯이 일정한 규칙으로 구성돼야 완성도가 높다. 튀김 온도, 시간, 반죽의 밀도, 향의 조절 등 조직적인 공정 없이는 일관된 효능과 맛을 낼 수 없다. 전쟁의 '군율'처럼 음식에도 체계와 규범이 있어야 효능과 맛이 유지된다는 의미다.
이처럼 손자병법의 전략은 전쟁뿐 아니라 음식의 모든 면에 응용할 수 있는 보편적 지혜다.
◇ 우리나라의 다도
차는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덖고 말려 완성한 음료다. 잎을 따는 시기나 이를 가공하는 방식에 따라 맛과 향, 그리고 이름이 다른 다양한 차가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차가 본격적으로 심어진 것은 828년, 신라 흥덕왕 때 차나무를 심으면서부터였다.
그 후로 차는 산사의 스님과 화랑 사이에서 널리 퍼져, 정신 수양의 도구이자 마음을 다스리는 길벗이 됐다. 불교문화가 꽃피운 고려 시대에 이르러 차 문화는 깊어졌고, 이후 세월의 흐름 속에 일시적으로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다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며 다도(茶道)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피어났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다례(茶禮)는 유교적 질서와 격식 속에서 더욱 정제됐다.
차를 마실 때의 예법인 다례는 형식이 아니라, 마주 앉은 이에게 마음을 다해 예를 갖추는 일이다.
조용한 다실에서 나직한 숨결과 함께 차를 우릴 때, 손님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올릴 때, 혹은 차를 중심으로 한 의례의 자리에서는 그 분위기에 걸맞은 품격과 절제가 스며든다.
차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고요한 시간이자 예(禮)를 실천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한국의 차 문화는 오랜 세월을 거쳐 스러지지 않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차 한 잔에 담긴 시간과 마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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