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 난민르포] ⑼"검은 피부 이유로 학살"…인접국 차드로 피란

연합뉴스 2025-04-15 08:00:07

수단 서다르푸르서 차드 은자메나로…"트라우마 속 나그네 신세"

차드 정부 'RSF 지원설' 예민…미디어 허가 보류로 난민캠프 취재 무산

차드 은자메나서 거주하는 수단 난민

(은자메나[차드]=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그날만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합니다. 자동차를 훔쳐 가고, 시장을 다 털었어요. 난민캠프를 공격하고 초등학교, 중학교 등도 공격했죠. 학교 바로 옆 우리 집까지도요."

설득 끝에 어렵게 인터뷰에 응한 수단 난민 모하메드 고바라(가명·27) 씨는 지난 3일(현지시간) 수단 난민이 운영하는 차드 수도 은자메나의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나 "학살 트라우마가 여전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고바라 씨는 수단 서다르푸르주 주도 '알주나이나' 출신이다. 이곳과 차드 국경과 거리는 25km 정도다.

그는 수단 군부 간 갈등에서 비롯된 분쟁이 발발한 지 닷새 만인 2023년 4월 20일, 준군사조직 신속지원군(RSF) 측이 서다르푸르 지역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고 그날의 기억을 꺼냈다.

다르푸르에 근거지를 둔 RSF는 집마다 돌면서 돈이 될 만한 가구와 침대, 가전제품, 양철지붕 등을 모조리 가져갔다. 이들이 지나간 자리 곳곳마다 불길이 솟구쳤다고 그는 회상했다.

차드 수도 은자메나 거리 모습

그는 "두 달 동안 전기가 자주 끊겼고 물은 나오지 않았다. RSF는 근처 난민캠프 곳곳에 불을 질렀고 구역을 옮겨가며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훔쳤다"며 "부서진 집 창문 밑에서 숨어 지내다가 6월 20일에 간신히 여섯 가족 모두 탈출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웃들은 검은 피부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학살의 대상이 됐다"며 "당시 정부군은 알주나이나 밖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급한 상황에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수단은 1956년 영국과 이집트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잦은 내전에 시달렸다. 수니파 이슬람을 믿는 북부 아랍계와 토착 신앙과 기독교를 믿는 남부 아프리카계 흑인 간 이질감이 심해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2013년 8월 창설된 RSF는 세계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던 오마르 알 바시르가 '다르푸르 내전'(2003∼2020년)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아랍계 민병대 '잔자위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알 바시르 치하 수단은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우며 아랍계 우대 및 흑인 소외 정책을 펼쳐 반발을 샀다.

잔자위드를 계승한 RSF는 다르푸르의 무장세력 진압은 물론 민주화 시위에 맞선 군부를 지원하며 학살과 방화, 성폭행 등 다수의 잔혹 행위를 저질러 악명이 높았다.

다르푸르에는 푸르족이 대다수인데, 푸르족은 이슬람과 흑인 토착민의 혼혈이다. RSF는 2023년 4월 분쟁 때는 다르푸르 지역 토착 흑인을 대거 학살해 '인종청소' 논란이 일었다.

차드 수도 은자메나 모습

남다르푸르주의 니알라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고바라 씨는 졸업 후 건축 일을 하고자 했으나 내전으로 인해 꿈은 물거품이 됐다. 니알라도 RSF가 점령하면서 도시와 주변 마을은 크게 파괴됐다.

그는 수단과 차드 국경 지역인 아드레 난민캠프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다가 관절염이 심한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은자메나로 왔다. 유통 중개업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마하마트 데비 이트노 차드 현 대통령과 같은 자가와 부족 출신이라서 은자메나 생활은 다른 수단 난민들보다 다소 나은 편이다. 자가와 부족이 권력을 유지하고 있어 친척 등 네트워크를 통해 일부 도움을 받고 있다.

그는 "전쟁이 빨리 끝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라며 "몸은 차드에 있지만 여전히 나그네 신세"라고 했다. 지난해 병으로 세상을 떠나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어머니를 떠올리면서는 눈물도 보였다.

차드 수도 은자메나 거리 걷는 수단 난민들

기자는 수단 내전 발발 2주년(4월 15일)을 맞아 수단 난민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인근 3개국(이집트, 남수단, 차드) 난민캠프 등을 차례로 방문해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자 했다. 차드가 마지막 여정이었다.

아프리카 국가 특성을 고려해 입국 비자, 초청장 발급, 미디어 허가 등 차드 취재 관련 절차를 한 달 전부터 진행했다. 하지만 통상 24시간에서 1주일이면 나온다는 미디어 허가가 이례적으로 보류되면서 아드레 등 난민캠프 취재는 아쉽게도 무산됐다.

당초 기자는 유엔세계식량계획(WFP)과 유엔인구기금(UNFPA) 도움을 받아 유엔난민기구(UNHCR), 유엔아동기금(UNICEF) 등과 수단-차드 국경 지역인 아드레를 비롯해 가가 난민캠프, 모우라 난민 캠프 등을 3박 4일 일정으로 취재하기로 돼 있었다.

은자메나에 도착해 관련 서류를 수령하고자 차드 정부에서 미디어 허가를 담당하는 HAMA 측을 매일 찾아갔지만, 4일 내내 묵묵부답이었다.

HAMA 측은 당초 "취재 일정 전날에는 무조건 승인된다"며 기다리라고 했지만, 보안 당국(GIS)에서 허가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음에 차드를 다시 방문하면 허가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미디어 허가 담당하는 차드 정부 HAMA 사무실 전경

차드에서는 미디어 허가 없이 난민캠프 방문 등 공식적인 취재 활동이 불가능하다. 이를 어기면 구금될 수 있다.

실제로 기자가 은자메나에 머물 때 일본 기자들이 허가 없이 거리에서 사진 촬영을 하다가 붙잡혔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차드 당국 관계자는 "정부는 부인하고 있지만 RSF 측을 지원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어 수단 정부와 관계에서 예민한 편"이라며 "차드 내 수단 난민 관련 취재에 신중한 입장이라 최근 비슷한 문제를 겪은 외국인 기자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수단 정부군 측은 지난해 12월 아랍에미리트(UAE)가 '반군' RSF 측에 다량의 무기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또 이들 무기가 차드 은자메나 공항과 암자라스 공항을 통해 수단으로 건너왔다며 차드 정부를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차드 정부는 RSF 연계설을 전면 부인한다.

raphae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