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50쇄 돌파' 인기…'문단계 아이돌' 별명 얻어
"누군가 제 시 읽고 시를 좋아하게 된다면 가장 기쁜 일"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기다리지 않을 거야. 마중도 배웅도 없이 들이닥치는 것들 앞에서는 그냥 양손을 펴 보일 거야. 하나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 (시 '손금' 에서)
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마중과 가는 사람을 보내는 배웅은 모두 예고된 만남과 이별에서만 허락된다. 하지만 좋든 싫든 대부분의 만남과 이별은 예고 없이 일어나고, 이 때문에 마중도 배웅도 없이 이뤄진다.
시인 박준(42)이 7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창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그로 인한 아쉬움을 일상적이면서도 섬세한 시어로 표현한 53편의 시와 1편의 산문이 수록됐다.
박준은 11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느닷없이 다가오는 사건이나 사람, 변화하는 감정 앞에 너무나 당황스럽고 그 앞에서 속절없이 뾰족한 방법을 내지 못하곤 한다"며 "어떤 변화를 겪든 정서적 여유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고 시집의 바탕에 깔린 정서를 얘기했다.
그는 이어 "화자가 양손을 펴 보이는 건 늘 아무런 준비 없이 무수한 일을 맞닥뜨리면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집은 1∼4부로 구성됐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라는 소제목을 붙인 4부에 실린 15편은 장례식이라는 소재를 구심점으로 심상과 감정을 연결해 마치 잘 짜인 하나의 영상물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블랙리스트'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 자기 장례식에 부르지 말라고 당부했던 이들이 빈소를 찾아와 서럽게 우는 모습이 담겼다. '상'은 장례식에서 상을 비워둔 채 어디론가 사라진 조문객의 빈자리가 수다스러운 화자의 목소리로 쓸쓸하게 묘사된다.
4부에 실린 시들은 실제 시인이 겪은 이별과 그로 인한 슬픔이 담겨 있다. 박준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겪었다"며 "이제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들보다 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이런 이유로 이번 시집은 장례식 또는 죽음과 관련한 시들로만 채워질 뻔했다. 하지만 시인은 한 가지 감정으로만 시집을 모두 채우는 것이 알맞지 않다고 생각해 4부에 실은 15편으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갈음했다.
박준은 "슬픔 앞에서 '내가 이 이야기 말고 다른 것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아무리 한 감정에 사로잡혀있어도 미감이든 메시지든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했다"며 "다투는 두 생각이 적절하게 화해를 본 게 지금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4부의 소제목이기도 한 시 '일요일 일요일 밤에'는 2021년 5월 시인이 아버지와 함께 tvN 예능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당시 공개한 것으로,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심경이 담겼다.
"일신병원 장례식장에 정차합니까 하고 물으며 버스에 탄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가 운전석으로 가서는 서울로 나가는 막차가 있습니까 묻는다 자리로 돌아와 한참 창밖을 보다가 다시 운전석으로 가서 내일 첫차는 언제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시 '일요일 일요일 밤에' 전문)
당초 방송에서 공개할 때는 '일산병원 장례식장'이었으나 시집에는 '일신병원 장례식장'으로 실렸다. 얼핏 보면 알아채기 어려운 획 하나의 차이가 뭔지 궁금했다.
박준은 "실제 '일산병원 장례식장'은 현존하는 장례식장이고, 제 의도와 관계 없이 어떤 독자에겐 '내가 그곳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냈지' 하고 떠올리며 상처가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며 "찾아보니 '일신병원'은 몇 곳 있지만, '일신병원 장례식장'이란 곳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자유롭게 쓰되 제가 쓴 결과물이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제가 시를 쓰는 가장 큰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박준은 '문단계의 아이돌'로 불릴 정도로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다.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년)를 50쇄 넘게 찍을 정도로 많이 팔렸다. 게다가 신동엽문학상, 박재삼문학상, 편운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으며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특히 2021년 '유퀴즈 온 더 블럭' 출연 후 더 많은 독자가 시를 찾아 읽고, 강연이나 행사에서 만난 독자가 "내 돈 주고 처음 산 시집이 박준 시인의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박준은 "그런 독자를 만나면 저는 꼭 '제 시집을 읽고 나서 다른 (시인의) 시집도 사셨나요' 하고 묻는다"며 "제 시를 읽은 사람이 시를 좋아하게 됐다면 가장 기쁜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시가 하나의 숲이라면 그 숲의 시작을 알리는 나무가 있을 텐데, 제 시가 그런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숲에서 가장 거대하거나 멋진 나무는 아닐지라도 '여기서부터 숲이 시작합니다' 하고 알려주는 역할만으로도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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