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오페라단이 10년 만에 새롭게 올린 대작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존 듀가 연출한 2015년 서울시오페라단의 '파우스트'가 현대적 은유와 유머로 가득한 본격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연출가가 특정 의도로 원작의 시대와 설정을 자유롭게 바꾼 극)였다면 2025년 엄숙정이 연출한 '파우스트'는 오페라에 입문하는 초심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친절한 프로덕션이었다. 휴식 시간 두 차례를 포함해 3시간 15분간 진행된 긴 공연이었지만, 지난 11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 공연을 본 관객들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워낙 장면이 다채롭고 귀에 익은 명곡이 많은 오페라이기도 한데다, 속도감 넘치는 연주와 무대 변환 덕분에 더욱 흥미진진한 공연이 가능했다.
지휘자 이든이 이끈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프랑스 오페라 특유의 색채감이 돋보이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음악을 선사했다. 폭발하는 포르티시모('매우 강하게' 하라는 연주 지시)의 극적 효과도 훌륭했지만, 점진적으로 진해지거나 연해지는 음악의 섬세한 그러데이션(gradation)도 인상적이었다. 신재희의 무대디자인은 젊음, 고독, 신, 악마 등 '파우스트'의 키워드들을 새긴 무대 중앙의 피라미드로 주인공 파우스트의 학문적 노고와 인간적 욕망을 압축했다. 양쪽 옆에서 흘러내리는 모래 더미는 평생 쌓아 올린 그 모든 성과가 허무하게 사라져감을 상징하는 듯했다.
이번 공연에서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시시각각 적절하게 변화하는 김윤주의 조명과 장수호의 영상이었다. 맑고 푸른 하늘, 먹장구름이 가득한 하늘, 화산이 폭발한 듯 검붉은 하늘을 장면 분위기에 빈틈없이 매치했다. 무대를 회전시켜 피라미드의 뒷면을 다양하게 활용한 것도 효과적이었다. 김지영의 의상디자인은 각 등장인물의 개성을 잘 드러냈고 무용수들의 의상 역시 적절하게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효과를 자아냈다. 그러나 합창단의 통일된 의상은 스타일과 문양 등이 생경하게 느껴져 다른 인물들의 의상과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강대영의 분장디자인은 악마 분장에서 특히 진가를 발휘했고, 소품 디자이너 곽내영은 이번 공연의 세심한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합창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인 만큼 위너오페라합창단의 역할도 컸다. 60명에 달하는 합창단원들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장면들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객석에 놀라운 활력과 신명을 실어 날랐다. 김성훈의 안무로 갖가지 역할을 소화해낸 무용수들은 외계 생물체처럼 보이는 악마들의 춤 장면과 마녀들의 축제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에서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파우스트의 연구실을 보여주는 1막에서 노년의 파우스트를 배우 정동환이 맡았다는 점이 이번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연극배우의 어느 정도 과장된 발성과 연기가 오페라 속 파우스트의 성격에 반드시 부합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페라에 연극을 접목한 이 발상은 2막의 본격적인 사건 전개에 앞서 다소 길게 느껴지는 1막을 짧게 정리해주었다는 점에서 오페라 초심자들에게는 적합한 선택이었다. 젊은 파우스트 역의 테너 박승주가 1막에서 가면을 쓴 채 부분적으로 노래를 부른 부분과 메피스토펠레스 역의 베이스 전태현이 젊은 파우스트와 노년의 파우스트를 양쪽으로 상대하며 연기를 펼치는 복잡한 장면에서는 엄숙정의 연출력이 빛났다.
박승주의 뛰어난 미성과 곧은 가창법 그리고 서정적인 표현력은 파우스트의 캐릭터에 정확하게 어울렸다. 마르그리트 역의 소프라노 황수미는 순수하고 경건하면서도 열정적인 여주인공의 사랑과 절망을 음악과 연기에 완벽하게 담아내 큰 갈채를 끌어냈다. 치밀하게 계산된 발성과 몸짓으로 유혹자의 매력을 아쉬움 없이 보여준 전태현, 발랑탱의 아리아 '고향을 떠나며'에 기품과 간절함을 담아 관객을 설득한 바리톤 김기훈, 청량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색으로 시선을 끈 시에벨 역의 메조소프라노 정주연, 드물게 매혹적인 마르트를 연기한 메조소프라노 정세라, 작은 배역이지만 존재감이 뚜렷했던 바그너 역의 베이스 최공석까지 모두가 적역이었다. 공연은 두 캐스트로 13일 일요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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