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의 신작 초연…생동감 넘치는 일인다역 연기 돋보여
(서울=연합뉴스) 박원희 기자 = 아이맥스(IMAX), 3D, 가상현실(VR) 등 어느 콘텐츠보다 실감 나는 판소리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소리꾼 1명과 고수(鼓手) 1명이면 충분했다.
이자람의 판소리 신작 '눈, 눈, 눈'이 지난 7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초연했다.
'눈, 눈, 눈'은 한국의 대표 소리꾼 이자람이 5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주인과 하인'을 원작으로 이자람이 재창작했다. 공연 전 그는 프랑스 지인으로부터 이 소설을 추천받아 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1879년 성탄절이 지난 연말 러시아의 한 마을. 상인 바실리가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일념으로 고랴츠키노 숲을 사기 위해 떠난다. 말이 없는 일꾼 니키타와 멋진 갈색 윤기를 자랑하는 종마 제티가 그와 동행한다. 그러나 살을 에는 러시아의 동장군과 눈보라가 앞길을 막아서고 바실리와 니키타, 제티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그들의 여정이 이야기의 전부다. 작품의 주요 요소가 되는 눈이 공연 제목이 됐다.
단조로운 서사는 이자람의 연기를 거쳐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이자람은 바실리, 그의 아내 아나스타샤, 니키타까지 넘나드는 일인다역 연기로 무대 위에 그들을 불러냈다. 종마 제티까지도 그의 연기 대상이었다. 머리를 니키타의 어깨에 비비며 장난치는 모습이나 "히잉"하고 우는 소리까지 재현했다. 소설 속의 캐릭터 묘사는 이자람의 목소리와 손짓, 표정을 거쳐 생생히 눈앞에 그려졌다. 여기에 눈보라를 표현하는 관객들의 목소리, 조명, 연기까지 더해지자, 무대는 단숨에 1879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러시아 설원으로 변했다.
이자람이 뽑아내는 소리는 고수 이준형의 북소리에 실리며 생동감을 뒷받침했다. 그는 극 중 상황에 맞춰 다채롭게 소리를 들려줬다. "한참 간다"고 노래할 때는 길게 한 음절씩, "멈춘다"고 노래할 때는 한 음절씩 짧게 끊어서 표현하는 식이다. 노래의 리듬감까지 더해지면서 긴박함과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관객들은 소리를 따라가며 바실리와 니키타, 제티가 위기에 빠질 때는 안타까워하고 그들이 생의 고비를 넘을 때는 안도의 박수를 보냈다.
외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 공연인데도, 판소리의 해학은 여전했다. "술 먹으면 괴물이 되는" 니키타와 그런 그가 술의 유혹에 시달리는 모습을 묘사한 대목은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자람은 관객의 부담을 덜기 위해 현재와 거리를 둔 시대의 외국 소설을 원작으로 선택한다고 밝혔지만, 작품은 그의 소리를 거쳐 '우리의 것'으로 재탄생한 듯했다.
이자람은 '작가의 글'에서 "창작을 합니다만 전통을 하고 있다"며 "이것이 제가 판소리를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공연은 오는 13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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