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차단 위한 EU의 숨은 전략…완충지대에 국경관리 '외주화'
2015년 난민위기 뒤 유럽 극우정치 부상…反난민 분위기, 트럼프도 일조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취임 직후부터 특유의 쇼맨십으로 대대적인 불법 이민자 체포와 추방에 나서고 있다.
수갑을 찬 불법 체류 이민자들이 줄줄이 군용기에 탑승하는 장면이 미디어에서 크게 다뤄졌다. 미 해병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남부 국경에 배치되는 영상도 공개됐다.
이들이 단순한 불법 체류자가 아니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연출이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반이민 정책을 대놓고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면 유럽은 조용하고 체계적으로 같은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유럽 각국과 유럽연합(EU)은 서부발칸 국가들의 조력 속에 국경을 강화하고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거래를 통해 아프리카 난민 유입을 차단하고 있다.
특히 튀니지, 리비아 같은 나라들이 EU의 지원을 받으며 국경 단속을 강화하다 보니 아프리카 난민들은 더 위험한 우회로를 선택하거나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버려지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를 겪고 있다.
아프리카 난민들의 유럽행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더 가혹한 환경에 내몰리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 EU의 '조용한 강경책'…서부발칸, 유럽의 '난민 완충지대'로
유엔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9월까지 EU 회원국들은 32만7천880명에게 추방을 통보했다. 같은 해 7월부터 9월까지 그중 2만7천740명이 실제로 강제 송환됐다.
이는 2023년 12월 통과된 '신(新) 이민·난민 협약'이 지난해 6월부터 발효된 데 따른 것이다.
3년간 협상 끝에 타결한 이 협약에 따라 EU 회원국들은 추방 절차를 신속히 진행하고 구금 시설을 확대하며, 제3국과 협력을 강화해 강제 송환을 더 원활하게 하고 있다.
특히 EU 가입을 희망하는 발칸 국가들이 EU의 요구에 협조하면서 사실상 EU의 국경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열린 EU-서부발칸 정상회의에서 EU는 "이민 관리 분야에서 협력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 공동과제"라고 선언했다.
이 회의에는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등 서부발칸 6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6개국 모두 오랫동안 EU 가입을 희망하는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EU는 직접적으로 난민을 자국에서 내쫓기보다 '완충지대'인 서부발칸 지역을 사실상 난민 수용과 추방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서부발칸 국가 사이에서는 EU가 원하지 않는 난민들을 버리는 쓰레기장으로 전락했다는 자조 섞인 반응까지 나오고 있다.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 이민자 수용소 2곳을 건설해 지난해 10월부터 가동 중이다.
이탈리아 해상에서 구조한 이민자를 자국으로 들여보내지 않고 알바니아에 보내 망명 심사를 거친 뒤 곧바로 강제 송환하는 방식이다. EU 회원국이 아닌 알바니아에서 인권 침해가 발생하더라도 EU는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다.
이런 방식은 인권 단체들로부터 "EU가 난민 문제를 제3국으로 외주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튀니지·리비아와 돈 거래…EU의 난민 차단 전략과 인권문제
EU는 난민을 추방하는 동시에 유럽으로 난민 유입 자체를 차단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향하는 대표적인 항로는 북아프리카 튀니지, 리비아 해안에서 이탈리아, 그리스, 몰타 등으로 들어가는 지중해 중부 루트다. 항해가 쉽지 않아 '죽음의 뱃길'로 불리는 구간이다.
EU의 국경 경비 기관인 프론텍스(Frontex)에 따르면 지난해 지중해 중부 루트를 통한 불법 입국 건수는 약 6만7천건으로 전년 대비 59% 감소했다. 서부발칸 루트를 통한 불법 입국이 78% 급감한 것과 거의 맞먹는 수치다.
이러한 변화는 EU가 2023년부터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에 국경 관리를 위한 재정 지원을 제공한 결과다.
EU는 2023년 7월 유럽행 길목으로 꼽히는 튀니지와 '포괄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불법 이민 차단을 조건으로 총 10억 유로(약 1조5천억원) 상당의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이후 모리타니, 이집트 등과도 유사한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그러나 인권 단체들은 이들 국가가 이민자들의 유럽행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음식과 물도 없이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 난민들을 버리거나 구금 시설에서 고문, 성폭력이 발생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리비아는 지중해에서 난민 보트를 차단하는 과정에서 실탄을 발포하고 난민들을 폭력적인 민병대에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EU가 이에 필요한 장비와 정보를 제공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주로 이탈리아로 향하는 지중해 중부 일대 단속이 강화되면서 서아프리카 쪽 항로를 통해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로 향하는 이민자 규모가 급증하는 등 부작용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세네갈 등 서아프리카와, 우크라이나 국경을 맞댄 동부 국경 쪽 유입은 각각 18%, 192%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 극우 정치의 부상과 트럼프가 남긴 그림자
유럽에서 반난민 정서가 생겨난 계기는 아프리카·중동에서 100만명이 유럽으로 몰려든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럽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2011년 유럽재정위기의 여파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경기 침체와 부족한 일자리로 인해 사회적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대규모 난민이 갑자기 유입되자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다.
"우리도 힘든데, 난민까지 도와야 하느냐"라는 불평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많은 사람은 난민이 자신들의 일자리와 삶을 위협한다고 느꼈다.
유럽의 극우 정당과 정치인들은 그들의 분노에 편승해 영향력을 점차 확대했다. 그 결과 난민 위기 10년이 지난 지금, 유럽은 소위 '극우 정치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럽의 반난민 정책 강화에 트럼프 대통령의 영향이 크다고 분석했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루이스귀도카를리대의 크리스토퍼 하인 이민·망명법 교수는 연합뉴스와 서면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자를 범죄, 마약 밀매, 공공 지출 증가의 주범으로 지목하며 강경한 언어를 사용했고, 이는 유럽에서도 이민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지적했다.
하인 교수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나라가 겪는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아프리카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며 "아프리카 이민 문제는 보다 정교한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chang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