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경험, 반헌법적 계엄 종식시킨 원동력
미완의 5·18이 12·3 계엄에 건넨 과제는 진상 규명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정다움 기자 =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일단락된 12·3 비상계엄은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로 촉발된 5·18 민주화운동을 목격한 광주에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오월 관계자들은 1980년의 경험은 반헌법적 계엄을 종식한 원동력으로 또한번 발전했다며 이제는 역사의 교훈을 토대로 진상 규명을 추동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12·3 비상계엄 사태는 헌정사에 위헌과 탄핵의 역사를 더하게 됐다.
이번 결정은 헌정을 유린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거듭 확립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후 항거하던 국민을 학살했던 전두환 신군부는 17년 만에 법정에 섰다.
44년 만인 12·3 비상계엄에서는 123일째에 대통령 파면이라는 헌법 질서 확립의 첫 단추가 끼워졌다.
헌재는 선고 요지에서 "군경을 동원해 국회 등 헌법 기관의 권한을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재현해 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다" 등 국민의 피로 지켜온 민주주의 가치를 전면에 세웠다.
12·3 비상계엄은 역설적으로 첫 장면부터 성숙한 민주주의의 단면을 확인시켰다.
윤 전 대통령의 기습적인 계엄 선포 후 군 병력은 국회를 해산시켰던 1980년 5월처럼 의사당 장악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한밤중 달려 나온 시민의 저항에 가로막혔다.
청년 세대인 12·3 계엄군도 군홧발로 시민을 짓밟았던 1980년과는 달랐다.
분말 소화기로 국회의사당을 지킨 국민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원순석 5·18 기념재단 이사장은 "오월 광주에서 이어진 민주화 투쟁이 12·3 내란을 국민의 손으로 막아내도록 했다"며 "한강 작가가 던졌던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답변이 이번 계엄을 통해 나왔다"고 분석했다.
긴박했던 '서울의 밤'을 지켜본 전 세계도 5·18과 6월 항쟁을 거쳐 군사정권 종식까지의 경험이 12·3으로부터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했다고 평가했다.
민주화 여정의 분기점마다 거리로 나왔던 시민은 또다시 전국 곳곳에서 광장을 메웠다.
5·18 역사 현장인 광주 금남로에는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동안 누적 인원 10만5천여 명이 운집했다.
미래 세대인 청소년들은 교실에서 생중계로 헌재의 결정을 시청하며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학습했다.
광주 성덕고등학교 김학노(17) 학생은 "헌신하며 민주화를 지켜주신 분들 덕분에 대통령 파면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이날 소감을 전했다.
진상규명에서만큼은 미완에 그친 5·18은 12·3에 과제도 제시했다.
사법 정의를 세우고도 섣부른 사면과 화해 시도로 학살 책임자들이 사죄 없이 세상을 떠났고, 신군부 세력이 몰아간 폭동 논리로 5·18은 여전히 공격받는다.
송선태 전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헌정 질서를 파괴한 범죄자는 후세를 위해서라도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례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12·3의 진상을 명확하게 밝혀 국민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차분하고도 질서 있는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hs@yna.co.kr
dau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