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남녘은 '꽃대궐'
(구례=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지리산 성삼재와 차일봉엔 하얀 잔설이 아직 녹지 않았는데 산 아래 구례 산동면에는 노란색 파스텔을 칠한 듯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산에서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으로 사랑받는 산수유의 꽃말은 '영원불멸의 사랑'이다. 불멸의 사랑을 찾아 걷기를 시작하자.
성삼재 너머에는 노고단과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이 오늘도 우람하게 이 땅을 지키고 섰을 것이다. 전남 구례 산동면 산수유 마을에서 바라보면 성삼재 왼쪽은 만복대, 오른쪽은 차일봉이다.
지리산 골바람은 차가웠지만 산수유 마을은 성급하게 봄 마중 나온 관광객들로 이미 북적대고 있었다.
예년에 비해 낮은 기온으로 인해 산수유는 만개하지 않았다. 산수유 축제도 며칠 더 기다려야 했지만, 나들이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기쁜 표정이었다.
산수유꽃은 매화, 벚꽃과 함께 대표적인 봄꽃이다. 매화나 벚꽃보다 빨리 피는 것으로 알려진 새봄의 전령이다.
국내 최대의 산수유 군락지는 전남 구례이다. 전국 산수유나무의 70%가량이 구례에서 자란다.
산수유가 꽃 피는 3월이면 구례를 찾는 관광객은 약 100만 명에 이른다.
◇ 구례, 봄을 걷다
산동면에는 산수유 풍경과 이야기를 따라 걷는 산수유길이 길다. 총 5개 코스, 12.4㎞에 달한다.
대표 코스인 1코스에서는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인 서시천과 노란 산수유꽃이 어우러진 풍경이 시정을 자아낸다.
1코스는 3.6㎞ 정도다. '꽃 담길'이라 명명된 1-1코스는 산수유 사랑공원, 산수유 문화관, 반곡마을을 지난다.
'꽃길'이라 불리는 1-2코스 끝에는 지리산 산나물, 말린 산수유 열매 등을 파는 지리산나들이 장터가 있다.
산수유 사랑공원은 이 꽃이 상징하는 '영원불멸의 사랑'을 주제로 조성됐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공원에 서면 산수유꽃이 수놓은 정겨운 마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골짜기 밑, 소반 같이 평평한 곳에 형성된 반곡마을은 봄이면 산수유꽃으로 가득 차는 꽃 대궐이다. 탐방객들은 반곡마을과 서시천 사이에 놓인 나무 데크 길을 걸으며 추억을 쌓고 있었다.
5코스에서 가까운 계척마을에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심은 산수유나무가 있다.
수령이 1천 년 이상으로, '할머니 나무'로 불린다. 구례의 산수유나무는 이 시목지에서 보급됐다.
옛날 중국 산동성에 살던 처녀가 이곳으로 시집오면서 산수유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처녀의 모친이 고향을 잊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처녀에게 준 것이 산수유나무였다.
산수유 시목지는 남도 이순신 길 백의종군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제1구간은 산동 면 소재지, 운흥정, 지리산호수공원, 우리밀 체험관, 광의면 사무소로 이어지는데 11.7㎞이다.
이순신은 1597년 2월26일 한산도에서 체포돼 3월4일 한성 의금부에 투옥된다.
28일간 옥살이 후 4월1일 풀려나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했다.
이때부터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될 때까지 120일 동안 이순신이 거쳐 간 행로를 따라간 길이 백의종군로이다.
고뇌의 길을 미래의 희망으로 승화시킨 충무공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뚜벅이'들이 산수유가 흐드러진 봄날에는 특히 많다.
◇ 이제는 풍경이 된 고단했던 삶
구례군은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임야로, 경작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산간 지역이다.
농사짓기에 불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산동면 주민들은 약 천 년 전부터 생계유지 수단으로 약용 작물인 산수유를 재배했다.
집 주변, 산등성이, 개울가 등 흙이 있는 곳이라면 맨손으로 돌을 골라내고 산수유를 심었다.
골라낸 돌로 쌓은 돌담은 토양 유실 방지, 수분 증발 억제, 바람 차단, 뿌리 지지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가 됐다.
구례 산수유 군락지는 228㏊에 이른다. 수확한 열매가 고급 한약재로 팔려나가면서 가난한 산촌 주민들의 주 수입원이 됐다.
제주도 감귤나무, 고흥 유자나무처럼 산수유도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까지 공부시킬 수 있다는 말이 돌면서 '대학 나무'로 불렸다.
옛날 구례에는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부르튼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독성이 있는 씨를 제거해야 열매를 약재로 쓸 수 있는데 씨를 제거하기 위해 이로 씨를 깨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산수유 마을은 봄에만 특별한 게 아니다. 빨갛게 익은 열매가 탐스러운 가을, 수확하지 않은 붉은 열매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 겨울도 놓치면 아까운 선경이다.
하지만 꽃과 계절의 정취 이면에는 앞서간 사람들의 고단했던 삶이 자리하고 있다.
산지와 계곡에서 지속적으로 유지, 관리돼 온 산수유 농업은 2014년 국가중요농업유산 3호로 지정됐다.
◇ '인간을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선물' 산수유
산수유 열매는 예로부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건강에 매우 좋은 과실로 여겨져 왔다.
'무병장수를 책임지는' '건강 지킴이'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어린아이 야뇨증, 노인의 빈뇨 개선에 쓰일 정도로 신장 기능을 강화하고, 정력 증강, 노화 방지, 항염·항균, 혈당 강하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로와 무기력증 해소에 좋고 뼈와 눈을 튼튼히 한다. 층층나뭇과에 속하는 산수유의 열매는 8∼10월에 붉게 익는다. 1
0월 중순 이후에 수확해 육질과 씨를 분리하는데 육질은 술, 차, 한약 재료로 사용한다.
산동 산수유의 품질은 세계 제일로 꼽힌다.
구례의 자연환경, 토질, 기후가 산수유 생육에 적합해, 이곳에서 자란 산수유 열매는 육질이 두텁고, 시고 떫은 맛이 두드러지며, 색이 곱고 효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 지금 남녘은 꽃 대궐
구례에서는 3, 4월 꽃 잔치가 이어진다.
산수유 축제가 끝날 때쯤인 3월 말부터 벚꽃이 피기 시작해 4월 중순까지 섬진강, 서시천 일대를 중심으로 벚꽃 길이 300리 이어진다.
섬진강과 서시천 옆 자전거 길 약 50㎞는 동호인 사이에 '벚꽃 라이딩' 명소로 손꼽힌다.
매서운 추위를 이기고 피어나 불교적 깨달음을 상징하는 화엄사 홍매화도 구례의 봄을 알리는 전령사이다.
3월이면 '화엄 매' 사진 콘테스트에 참여하기 위해 작가들이 몰린다.
임세웅 구례군 문화관광해설사는 곳곳에 이름난 벚꽃 관광지가 많지만, 벚꽃 길이 가장 긴 곳은 단연코 구례라고 할 수 있다며 "조만간 구례는 산수유뿐 아니라 벚꽃 명소로도 전국 최대의 관광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꽃 동네는 구례를 지나 전남 광양, 경남 하동까지 이어진다.
매화 마을로 유명한 광양, 벚꽃 십 리 길이 상춘객을 매혹하는 하동은 구례 산수유 마을과 함께 남녘의 3대 꽃 마을로 통한다.
세 지역은 서로 가까운데 광양 매화마을을 찾았던 관광객이 구례 산수유 마을을 방문하기도 하고, 그 반대 경우도 흔하다.
하동 벚꽃 십 리 길로 향하던 나그네가 발 디딜 틈을 못 찾고 구례로 행선지를 바꾸기도 한다. 지금 한반도 남쪽은 꽃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황홀한 꽃 세상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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