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산과 들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찾아내 식탁에 올려 건강을 더하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다.
봄은 겨울을 견뎌낸 사람과 동물, 식물 모두에게 따뜻한 온기와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따스한 봄바람이 불면 아지랑이 사이로 싹트는 희망처럼 봄나물도 땅속에서 고개를 내민다.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존재는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파릇한 싹을 틔우는 봄나물이다. 밭둑과 들판에 잘 자라며 봄바람에 흔들리는 봄나물은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돋우는 소중한 먹거리다. 나물은 사계절 내내 우리 식탁에 오르지만, 특히 봄에 나는 나물은 더 귀하다.
삶거나 볶거나 생으로 무쳐 먹는 나물은 봄철 입맛을 돋우고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며 면역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양지바른 곳에서 먼저 싹을 틔우는 냉이와 달래는 봄을 알리는 전령과도 같다.
흙 속은 아직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지만 냉이와 달래는 누구보다 먼저 봄의 기운을 감지하고 얼굴을 내민다. 냉이는 단백질, 칼슘, 철분이 풍부해 춘곤증 예방과 피로 해소에 좋다. 달래는 비타민 C와 칼슘이 풍부해 빈혈과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성에게 특히 좋은 쑥은 무기질과 칼슘, 인, 비타민 A와 C가 풍부해 면역력을 강화하고 복통과 신경통 완화에 효과적이다. 두릅은 위궤양이나 위경련으로 속이 쓰린 사람들에게 좋은 나물이다. 쌉쌀한 맛이 매력적인 고들빼기는 '쓴 뿌리 나물'이라는 뜻의 '고돌채'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잎과 뿌리를 활용해 나물, 무침, 김치 등으로 즐길 수 있다. 또한 고들빼기에는 항산화 성분이 풍부해 인체의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세포 노화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듯 봄나물은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계절의 변화 속에서 몸을 건강하게 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자연의 선물이다.
◇ 어머니와 함께 캔 봄나물의 추억
어린 시절, 봄이 오면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마을 앞 양지바른 들판으로 향하셨다. 어린 내게도 봄은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고, 연초록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이다.
한 손에는 바구니를, 다른 한 손에는 작은 칼과 호미를 들고 봄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아들아, 쑥은 말이다, 이렇게 밑동만 살짝 잘라야 해. 뿌리까지 베어 버리면 안 돼. 그래야 다음 해에도 다시 자라난단다."
어머니는 능숙한 손길로 쑥을 잘라 바구니에 담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그 옆에서 어설픈 솜씨로 어머니를 따라 했지만, 어린 떡잎까지 잘라버리기 일쑤였다.
"이거 맞아?"
"응, 잘했다. 하지만 너무 어린 건 그냥 놔두자. 조금 더 크면 다시 오자꾸나."
봄 햇살이 포근하게 감싸고 들판을 가득 메운 쑥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렇게 한참을 뜯고 나면 바구니는 어느새 푸르스름한 향기로 가득 찼다. 집으로 돌아와 쑥을 깨끗이 씻었다.
차가운 우물물에 손을 담그면 겨울 끝자락의 냉기가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몇 번이고 물을 갈아 정성껏 헹군 쑥은 더욱 싱그러웠다. 손질한 쑥은 가마솥의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낸 후 냉수에 헹궈 물기를 꼭 짜 절구에 곱게 빻아 준비했다.
이제 맷돌을 돌릴 차례였다. 부엌 한쪽,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맷돌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하룻밤 물에 불려 바구니에 건져둔 멥쌀을 한 국자 떠 올렸다.
"아들아, 쑥과 쌀의 비율은 쑥 하나면 쌀은 하나나 하나 반 정도가 좋아. 한번 돌려볼래?"
나는 두 손으로 맷돌의 손잡이를 힘껏 밀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내 손 위에 살며시 손을 얹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밀어주셨다. 맷돌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고운 쌀가루가 흘러내렸다.
손끝으로 쌀가루를 집어 살짝 맛봤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향이 온몸에 스며드는 듯했다. 이제 반죽할 차례였다. 커다란 양재기에 쌀가루를 담고, 소금을 살짝 뿌린 뒤, 빻아 둔 쑥을 올리고 신화당을 넣은 뜨거운 물을 아주 조금씩 부어가며 치댔다.
손끝에 정성이 스며들수록 반죽은 탄력을 얻고, 쑥의 푸른빛이 더욱 짙어졌다. 이렇게 만든 반죽을 삼베 보자기로 덮어 숙성시키고, 부엌 한쪽에 놓아뒀다. 가마솥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자, 둥글납작하게 빚은 떡을 시루에 가지런히 올렸다.
20분 남짓, 부엌 가득 퍼지는 쑥 향기는 마치 봄날의 들판이 다시 찾아온 듯했다. 따뜻하고도 포근한 그 향기는 어린 마음에도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다 됐다. 이제 먹어보자."
어머니는 시루에서 갓 나온 개떡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내 손에 쥐여 주셨다. 따뜻한 떡이 손바닥 위에서 온기를 전했다. 한 입 베어 물자, 쫀득한 떡이 부드럽게 퍼지고, 씁쓸하면서도 달큼한 쑥 향이 혀끝을 감쌌다.
어머니와 함께한 쑥개떡의 시간은 추억 이상이었다. 봄을 맞이하는 의식이었고, 계절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는 과정이었다.
들판에서 쑥을 뜯고, 맷돌을 돌리고, 정성껏 반죽해 만든 개떡.
그 속에는 봄의 바람, 흙냄새, 그리고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도 어머니처럼 봄이 오면 들판으로 나간다. 하지만 그때의 따뜻한 손길과 맷돌 소리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 손자병법으로 본 봄나물 음식 만들기
손자병법 '용간의 장'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손자는 간첩을 활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마치 봄나물이 각기 다른 특성과 쓰임새로 자연에 적응하듯이, 간첩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봄나물의 대표 격인 쑥, 고들빼기, 냉이, 달래, 두릅과 함께 손자의 용간 전략을 비교해봤다.
향간(鄕間)은 적국의 주민이나 현지인을 이용해 정보를 얻는 첩자다. 쑥처럼 널리 퍼진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다. 쑥은 어디서나 잘 자라는 나물이다. 산, 들, 길가에도 흔하며 뿌리가 강해 쉽게 번진다. 마치 쑥처럼, 향간도 적국 곳곳에 스며들어 주변의 정보를 자연스럽게 흡수한다. 적군이 이동하는 길목에서 상인으로 위장한 첩자가 정보를 모으는 것처럼 쑥은 적의 동향을 자연스럽게 파악 및 분석하는 데 유리하다.
내간(內間)은 적국의 내부 사람을 포섭해 정보를 빼낸다. 고들빼기처럼 깊이 뿌리 내려 적의 내부를 파악한다. 고들빼기는 뿌리가 깊고, 한 번 자리 잡으면 쉽게 뽑히지 않는다. 씁쓸한 맛을 감추고 있지만 김치로 만들면 깊은 감칠맛을 낸다. 마치 적국 내부에 침투한 간첩이 오랫동안 숨어 정보를 캐내는 것과 같다.
고정간첩은 내부에서 신뢰를 얻고 결정적인 순간에 정보를 흘려준다. 예로 고들빼기는 적국의 장군을 매수하여 중요한 작전 계획을 미리 입수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반간(反間)은 적이 보낸 간첩을 역이용해 허위 정보를 전달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냉이처럼 땅속에 숨어 적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냉이는 땅속에 깊이 숨겨진 채 봄을 기다린다. 적이 보낸 첩자를 포섭해 적을 속이듯이 냉이는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가 가장 좋은 시기에 모습을 드러낸다.
즉, 적이 잘못된 정보를 믿고 실수를 저지르게 만든다. 예로 냉이는 적군의 간첩을 일부러 붙잡고 거짓 정보를 흘려보내 적이 허술한 방어선을 노리도록 유도한 후 역습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사간(死間)은 적에게 일부러 허위 정보를 흘려보내고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게 만든 후 희생되는 간첩이다. 달래처럼 강한 향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달래는 향이 강해서 한 번 맡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간은 적에게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리고 그 거짓이 사실처럼 보이게 해 강렬한 영향을 남긴다. 간첩은 희생될 수도 있지만 전략적 승리를 끌어낼 수 있다. 달래는 일부러 약한 부대를 적의 첩보망에 노출해 적이 공격하도록 유도한 후 함정을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생간(生間)은 적국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고 무사히 돌아와 보고하는 첩자다. 두릅처럼 귀한 정보를 안전하게 가져오는 것이다. 두릅은 봄이 되면 잠깐 돋아나기 때문에 귀하게 여겨진다. 생간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며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귀한 존재다.
예로 두릅은 적진에 침투하여 군량 보급로와 방어선의 약점을 확인한 후 돌아와 보고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나물 식문화는 한국인의 식생활에 깊이 뿌리내려 왔다. 서양의 샐러드 문화와 달리, 한국에서는 나물을 무치고, 볶고, 지지고, 튀기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즐겨왔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해 지구상의 어느 지역보다도 다양한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만 7천여 종의 식물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물은 평소에는 반찬으로 쓰였지만, 비상시에는 귀한 양식으로도 활용됐다. 예전에는 남녀노소 모두 나물을 익히 알아야 했다.
하지만 산과 들에 널려 있는 수많은 식물 중에서 먹을 수 있는 나물과 독성이 있는 식물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물의 특징을 노래로 만들어 기억하는 '나물 타령'이 생겨났다. '99가지 나물 노래를 부를 줄 알면 3년 가뭄도 이겨낸다'는 속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처럼 나물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건강과 먹거리를 책임지며 우리나라의 식문화에 깊이 자리 잡아 왔다.
한 끼 식사 속에 담긴 역사와 전통, 공동체의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추억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맛의 저장소 역할을 해왔다.
전 세계적으로 K-푸드가 주목받는 이 시대에 우리나라의 나물 또한 건강식품으로서 더욱 널리 알려질 때가 됐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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