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반란군에 헌재 앞 피바다…재 뿌린 데서 재동 유래
개화파, 헌재 터 홍영식 집에서 갑신정변 모의했다 실패
홍영식 폐가에 광혜원, 창덕여고 들어선 뒤 명당으로
벌써 세번째 탄핵 심판…팔자 센 尹, 땅 기운 누를까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헌법재판소가 있는 서울 안국역 북쪽 재동(齋洞)은 역사의 한이 서린 곳이다. 재동이란 지명은 1453년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일으킨 내란(계유정난)에서 유래했다. 수양의 반란군은 황보인 등 권신들을 입궐시켜 살해한 뒤 안국동을 거쳐 문무 대신이 살던 가회동의 한 마을로 달려갔다. 반란군은 그곳에서 윤처공과 이명민 등 충신들과 가족들을 도륙 내 동네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자 마을 사람들은 불에 타고 남은 재(灰:회)를 가져다가 길에 뿌렸다. 그 뒤로 잿골 또는 회동(灰洞)으로 불리던 마을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재동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재동은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모여 일본과 같은 근대국가로의 변혁을 꿈꿨던 곳이기도 하다. 김옥균과 홍영식, 박규수 등 개화파의 주체세력은 국정을 농단하던 중전 민씨(민자영) 등 민씨 척족세력을 모조리 처단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그들의 원대한 꿈은 '3일 천하'로 끝났다.
개화파의 근거지인 재동은 다시 핏빛으로 물들었다. 재동 북쪽 정독도서관 터에 살던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한 뒤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자객인 홍종우의 총을 맞고 숨진 뒤 국내로 이송돼 능지처참당했다. 홍영식은 청나라 군인들에게 난자당했고, 영의정을 지낸 그의 아버지 홍순목은 며느리, 손자와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1993년, 홍영식 일가의 죽음으로 폐허가 된 재동 집에 헌법재판소의 독립 청사가 들어섰다. 풍수지리에 밝은 일부 지관들은 이곳이 한 맺힌 터라며 난색을 표했으나 소수 의견에 그쳤다. 홍영식의 폐가가 세월이 흘러 길지(吉地)로 변한 것이 한몫했다.
홍영식이 죽은 1년 뒤 이곳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들어섰다. 얼마 안 가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뀐 광혜원은 나병과 결핵 등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치료하며 세브란스의대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제중원이 있던 자리엔 해방 후 창덕여고가 들어서 서울의 4대 명문여고로 발돋움했다. 김옥균의 혼이 깃든 정독도서관 자리에서 경기고는 한국 제일의 명문고로 성장했고, 매국노가 세운 휘문고는 지금의 현대 사옥이 있는 땅에서 국내 대표 명문 사립의 입지를 다지며 친일파 학교의 오명을 털어냈다.
헌재가 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한다. 대통령 탄핵재판은 2004년 당시 노무현, 2017년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벌써 세번째다. 불과 20년 사이에 오욕의 역사가 거듭 새겨지면서, 일부 역술인들의 말대로 재동의 드센 땅 기운이 되살아난 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생길 지경이다. 팔자 세다는 윤 대통령의 앞날이 더욱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ja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