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봄꽃을 기다리며 보는 눈꽃, 하코다테와 아오모리

연합뉴스 2025-04-02 09:00:06

(하코다테·아오모리=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자작나무가 눈 속에서 몸을 떨고, 지친 태양이 아득히 먼 숲을 물들이는 곳.

3월 일본의 북쪽 소도시는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한 줄 시냇물도 가는 겨울이 아쉽다.

봄의 문턱에서도 쌓인 눈을 한껏 바라볼 수 있는 곳.

하코다테와 아오모리에 갔다. 절묘한 조합이다. 혼슈의 최북단이 아오모리, 홋카이도의 최남단이 하코다테다.

두 곳은 바닷속 터널로 이어져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다.

◇ '홋카이도의 유럽' 하코다테

하코다테는 이국적인 항구 도시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일본 땅에 상륙해 개항을 압박했을 때 가장 먼저 문을 열었다.

서양 열강은 이곳에 영사관과 교회를 지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서양식 근대 건축물들이 유럽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크지 않은 시내에는 노면전차(트램)가 오간다.

하코다테역에서 전차로 5분만 가면 말쑥한 항구와 출렁이는 겨울 바다가 하코다테 낭만의 시작을 알린다.

해 질 무렵, 바닷가에 줄지어 선 붉은 벽돌 건물이 초록빛 구상나무, 오렌지색 가스등, 검푸른 바닷색과 어우러졌다.

개와 늑대의 시간, 하코다테의 첫발은 어스름 속 신비로움에 숨죽인다.

개항으로 교역이 번성하면서 창고로 쓰이던 이 건물(가네모리 아카렌가)은 지금 쇼핑몰이다.

늦은 저녁에 대비해 하코다테 지역 프랜차이즈 수제 햄버거 식당인 '럭키 피에로'에 들어갔다.

이 가게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햄버거 '차이니즈 치킨'과 감자튀김, 우롱차를 허겁지겁 먹었다.

화려하면서도 독특한 외관이 배불러도 한번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드는 곳이다.

하코다테에만 수십 개 점포가 있는데, 인테리어가 전부 다르다고 한다.

◇ 모토마치, 그리고 빛과 어둠

창고 쇼핑몰에서 나와 언덕길을 걸었다. 다시 눈이 내린다. 눈을 길 한쪽으로 치워놓았지만, 내리는 눈은 어쩔 수 없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한두 블록쯤 걸었나 싶었는데 눈앞에 서양식 건물들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레트로한 거리 풍경. 한눈에 이 동네가 그 유명한 '모토마치'임을 알았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러시아정교회, 옛 하코다테 공회당, 모토마치 성당, 영국성공회 교회, 영국 영사관 등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하다.

세계 3대 야경이 하코다테·홍콩·나폴리라는 주장이 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 얘기지만, '하코다테는 야경이 멋지다'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코다테산 위에서 야경을 보기 위해 로프웨이를 탔다. 눈 내리는 길거리는 한산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로프웨이 승강장은 관광객들로 장사진이다.

내리는 눈으로 하코다테의 화려한 불빛은 흐릿하게 번져 보였고, 그게 오히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석상자를 엎어놓은 것 같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사실 하코다테 야경이 보석 같은 건 검은색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 때문이다.

어둠이 없다면 빛도 없다. 항구의 화려함은 어두운 바다가 만든 것이다. 어부의 생업이 아름다움이 되는 순간이다.

◇ 은백색 별, 고료카쿠

이튿날 하코다테의 명물 중 하나인 아침시장을 둘러봤다. 새벽부터 상인들은 갓 잡은 듯 싱싱한 해산물을 가판대에 내놓고 팔았다.

눈이 와도, 추워도 시장은 문을 연다. 밤새 잡은 오징어도 빠지지 않는다. 하코다테가 오징어의 본고장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오전에 들른 고료카쿠는 특이하게도 별 모양의 요새다. 해자(垓子)로 둘러쳐져 있는데 둘레가 1.8㎞에 달한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으로 하코다테가 개항하자 막부가 서양 세력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요새를 점령한 건 막부 반대 세력, 요새를 공격한 건 서양이 아니라 정부군이었다.

당시 미국 요구에 굴복한 도쿠가와 막부에 불만을 품은 에노모토 다케아키(1836∼1908)는 1868년 군대를 이끌고 홋카이도를 건너와 '에조공화국'을 세우고 고료카쿠를 점거했다.

이듬해 정부는 정벌군을 보내 요새를 지키고 있던 반란 세력을 무너뜨렸다.

고료카쿠는 바로 앞에 지어진 98m 높이의 전망대에 올라가 보면 뚜렷한 별 모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눈 덮인 고료카쿠의 은백색 별은 봄이면 벚꽃이 뒤덮어 연분홍빛 별이 된다고 한다.

서둘러 하코다테역으로 향했다. 이제 신칸센을 타고 바닷속 터널을 건너 아오모리로 간다.

◇ 오이라세 계류

하코다테에서 아오모리까지는 기차를 3번 타야 한다.

하코다테역에서 신하코다테역까지 홋카이도 로컬 노선을 탄 뒤 신칸센으로 갈아타고 해저터널을 지난 뒤 신아오모리역에서 다시 지역 열차를 타고 아오모리역으로 간다.

번거롭지만, 시간만 잘 맞추면 어렵지 않다.

더욱이 역마다 대기하는 이용객들을 위해 각종 기념품점과 식당, 커피숍 등이 잘 갖춰져 있어 열차 여행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아오모리에서 첫 번째 목적지는 오이라세 계류(溪流)다.

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을 계류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은 아닌데, 일본에선 통용되는 듯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눈 덮인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창밖은 설경이 절경이다.

노송나무, 자작나무, 삼나무, 너도밤나무, 단풍나무 등 원시림이 층층이 쌓인 눈밭 위로 빽빽이 솟아 있고 그 사이로 물이 유유자적 흘러간다.

감히 손을 집어넣기가 불경스러운 맑디맑은 물이다.

얼마 안 가 사람들은 이 계류의 근원을 알게 된다.

거대하다는 표현이 상투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적절한, 바다 같은 도와다 호수가 눈앞에 나타난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칼데라 호수로, 이곳에서 오이라세 계곡으로 물이 흘러간다.

거대한 수원지 도와다호는 아오모리의 모든 계류에 생명의 물을 공급하는 창조주 같은 존재다.

오이라세에선 폭우가 내려도 웬만해선 계류의 물이 넘치지 않는데, 많은 양의 물을 빨아들이는 노송나무 때문이라고 한다.

눈 쌓인 숲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외로운 숲이 아오모리의 긴 겨울을 견뎌내는 건 아무래도 발치에 쌓인 눈이 함께 하기 때문이 아닐까.

숨을 품고 봄을 기다리는 겨울 나목은 어디든 대견하다.

◇ 다자이 오사무와 사과술

오이라세 계류는 국립공원으로 일본 정부가 지정한 특별 보호구역이자 특별 명승지다.

이곳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 호시노그룹은 이곳에 있던 호텔을 사들여 화려한 온천 리조트로 만들었다.

호텔 자체가 볼거리다.

계류에 사는 300여종의 이끼를 벽화처럼 만들어 복도에 걸어놓았고, 일본 아방가르드의 대가 오카모토 타로의 대형 청동 난로 작품 '숲의 신화'가 로비에서 눈을 즐겁게 해준다.

눈 덮인 자작나무와 빙폭을 감상할 수 있는 노천탕이 몸도 마음도 풀어주는 것은 물론이다.

아오모리는 사과 산지로 유명하다. 일본 전체 생산량의 60%가 이곳에서 난다.

어디서 무엇을 먹든 사과가 끼어든다. 사과술, 사과타르트, 사과잼, 사과주스, 사과차….

아오모리 출신인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기행 소설 '쓰가루'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친구 집을 방문하기 전에 편지로, '만나면 사과술을 마시자'고 하는데, 사실은 정종이나 맥주를 더 좋아하지만, 이 술들이 귀한 것이어서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에 아오모리에서 흔한 사과술을 먹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과술이 아오모리에서는 흔한 것일지 모르지만, 쇼핑몰에서 본 비싼 사과 브랜디는 꼭 한번 사서 마셔 보고 싶었다.

◇ 도와다와 미사와

아오모리현(縣)의 동쪽 끝에는 미사와시가 있고 그곳에 공항이 있다.

도쿄에서 아오모리로 올 때 이 공항을 이용하기도 한다.

미사와에 있는 아오모리야 리조트도 온천과 함께 아오모리 문화를 체험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오이라세가 '힐링' 콘셉트라면 이곳은 '문화'가 주테마다.

리조트에 들어서면 22만평의 광활한 부지에 오밀조밀 숲과 공원이 조성돼 있어 이곳만 둘러보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걸어도 좋고 마차를 타도 좋다.

건물 안은 여름에 열리는 아오모리의 성대한 축제 '네부타'에 사용되는 대형 인형과 형상들로 가득하다. 화려하기 그지없다.

온천과 저녁 식사 뒤에는 '네부타' 축제를 재해석한 오리지널 쇼를 관람할 수 있다.

긴 겨울을 견디고 봄이 오는 것을 기뻐하는 의미의 이 쇼는 출연진이 모두 이 리조트의 직원들이다.

북도호쿠3현과 홋카이도의 서울사무소 장성숙 부장은 "아오모리 사람들에게 네부타는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은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리고 성대하게 즐기는 축제"라고 설명했다.

마지막 날. '스노 몬스터'라는 별칭이 붙은 핫코다산의 수빙(樹氷)을 보려 했지만, 강풍 때문에 로프웨이가 운행되지 않았다.

수빙은 전나무나 구상나무 같은 나무들이 눈보라에 시달리다가 눈을 제 몸에 붙이면서 하얀 괴물 같은 형상이 된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도와다시 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아, 그런데… 현대미술관은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작은 소도시에 이런 미술관이라니.

쿠사마 야요이, 나라 요시토모, 론 뮤익, 서도호, 최정화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설치 작품들을 보며 삼매경에 빠진다면 자칫 도쿄행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다.

◇ information

▲ 하코다테나 아오모리 같은 일본의 소도시를 도쿄 같은 대도시와 함께 여행하고 싶다면 일본항공의 JAL 재팬 익스플로러 패스가 효과적이다.

타사 항공권을 포함해 일본을 떠나는 왕복 항공권을 가지고 있고 일본에 거주하지 않는 개인이라면 일본 국내선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실례로 이스타항공 인천∼삿포로 왕복항공권을 구매한 사람은 JR 등 열차운임보다 저렴하게 일본항공의 삿포로∼하네다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다.

JAL 재팬 익스플로러 패스는 일본항공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및 구매가 가능하다.

▲ 아오모리 오이라세 계류 리조트에 체류한다면 호텔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해보자.

계류에서 300여종의 이끼를 관찰하는 '이끼 산책', 단풍 명소산책(10월∼11월초), 밤에 환상적인 조명이 켜진 빙폭을 둘러보는 빙폭 라이트업 투어(12월 하순∼3월 중순), 계류 오픈 버스 투어(5월 중순∼11월 초) 등이 있다.

▲ 아오모리야 리조트에서는 사계절별로 즐길 수 있는 계절 한정 이벤트가 열린다.

봄에는 봄꽃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하나사카 축제', 여름에는 금붕어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하는 '시갓코 금붕어 축제' , 가을에는 '쟈와메구 사과 축제', 겨울에는 더 나은 새해를 기원하는 '왓츠도 개운 축제'가 열린다.

▲ 아오모리 미사와 공항을 이용하는데 시간이 남는다면 공항 바로 옆에 있는 항공과학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전시물과 체험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훨씬 근사하고 재미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