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만약 여자가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악이라면, 여성이라는 나의 존재에 도사리고 있는 악이란 무엇입니까? 물론, 저는 저의 비천함과 부끄러움을 압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의 시가 더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17세기 멕시코에서 활동했던 수녀이자 시인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1648∼1695년)의 시와 산문, 희곡 34편을 묶은 선집 '첫 꿈'(경당)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 출간됐다.
책에서 가장 주목할 작품은 여성의 학문 활동을 비판한 주교에게 보낸 서간문 '필로테아 수녀님에 대한 답신'이다. 역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선언이라고 불릴 정도로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소르 후아나는 글에서 수십 명의 여성 지식인의 사례를 거론하면서 여성의 지적 능력을 무시하는 남성 중심 사회의 편견에 정면으로 맞선다.
무려 975행에 달하는 장시(長詩) '첫 꿈'도 주목해야 한다. 밤이 찾아와 모든 피조물이 잠든 사이, 인간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절대 진리를 향한 여정을 떠난다는 이 시는 중남미 바로크 문학의 최대 걸작으로 꼽힌다. 철학과 천문학, 신학을 넘나드는 지적 탐구와 환멸의 여정을 탁월하게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학적 어휘와 복잡하고 어려운 문장을 사용해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문론적 수사법'이 제대로 구현된 작품이다.
이 외에도 신을 향한 사랑과 진리를 향한 열망을 담은 '10행시' 6편과 르네상스 시대의 짧은 운문 형식인 '에피그램' 4편 등에서도 교회 권위와 사회 질서에 도전하면서도 종교적 신념을 저버리지 않는 소르 후아나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생 성직자들의 견제와 방해에 시달리던 소르 후아나는 1693년 모든 글쓰기를 중단한다. 이후 1695년 전염병에 걸린 동료 수녀를 간호하다 감염돼 47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사후 한동안 문학사에 잊힌 존재였던 소르 후아나는 19세기 낭만주의가 유행하면서 지적 자유의 상징이자 페미니즘 선구자로서 서서히 재조명됐다. 그의 작품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오늘날 소르 후아나는 라틴계 국가들에서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 세르반테스에 필적하는 대문호로 여겨진다.
특히 멕시코에서는 '열 번째 뮤즈', '아메리카의 불사조'라는 별칭으로 불리면서 10페소 지폐의 모델로 기념되고 있다.
신정환 옮김.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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