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러·우크라·이란·시리아·이스라엘·팔레스타인 등에 영향력
나토 회원국들, 1952년 튀르키예 가입 후 반복된 쿠데타 눈감아줘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튀르키예에서 23년째 집권중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30여년 전인 1990년대에 민주주의를 버스에 비유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탔다가 내린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30일(현지시간) 과거 발언을 소개하면서 "가장 유력한 경쟁 대권주자의 구속으로 에르도안은 그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한 것으로 보이며, 이제 버스를 완전히 세워버릴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튀르키예 당국은 지난 23일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 소속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 겸 CHP 대선후보를 전격 구속하고 시장 직무를 정지시켰으며, 그의 대학 학위가 무효라며 대선 출마 자격을 박탈했다.
이에 항의해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으나 튀르키예 당국은 시위 참가자 수천명과 시위를 취재하던 외국 특파원들을 포함한 기자들을 체포하는 등 탄압에 나섰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그가 당수이던 정의개발당(AKP)이 2002년 의회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튀르키예의 실권을 잡았으며, 그 후 총리 취임, 대통령 당선, 대통령제 개헌 등을 통해 23년째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서방에 너무나도 유용하다. 에르도안이 (제재를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이 점 때문"이라는 제목의 분석기사에서 더타임스는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유용성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에르도안의 행태를 눈감아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창립 3년만인 1952년에 튀르키예를 회원국으로 가입시킨 것도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해서였다.
튀르키예는 중동과 유럽과 러시아가 맞닿고 이슬람교권과 그리스도교권이 만나는 곳이다.
북쪽에는 흑해가 있으며, 흑해 건너 북동쪽에는 러시아, 북쪽에는 우크라이나, 북서쪽에는 몰도바가 있다.
특히 튀르키예 북서부의 보스포루스 해협은 러시아 흑해함대가 지중해로 진출하려면 거쳐야만 하는 요충지다.
튀르키예가 이 곳을 막으면 러시아 흑해함대는 좁은 흑해에 갇혀버리게 된다.
북서쪽 육지로는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서쪽에는 그리스가 있다.
남쪽에는 섬나라 키프로스와 시리아가, 남동쪽에는 이란이 있다.
미국을 포함한 나토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런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1960년, 1971년, 1980년, 1997년에 튀르키예에서 발생한 쿠데타를 눈감아줬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권좌 복귀를 계기로 유럽의 방위 부담이 늘어나면서, 튀르키예는 유럽에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됐다.
튀르키예의 병력 규모는 35만여명으로, 현재 나토 회원국 중 미국에 이어 2위다.
방위산업 강국이기도 하다.
무기 자급률이 70%에 이르며, 탱크, 장갑차, 드론, 잠수함, 군함 등도 생산하고 TF-X 전투기 사업도 진행중이다.
우크라이나가 공급받는 무기 중 상당수가 튀르키예에서 생산된 것이며 특히 '바이락타 TB2' 드론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 주변국들에 대한 튀르키예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작년 12월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을 몰아낸 이슬람 무장단체 하야트타흐리르알샴(HTS)와 그 지도자인 아메드 알샤라 시리아 과도정부 임시대통령을 오래 지원했고 다마스쿠스 진격 작전과 집권에 결정적 도움을 준 나라가 바로 튀르키예다.
이를 통해 아제르바이잔과 시리아에서 튀르키예의 영향력이 커졌으며, 이란의 영향력은 퇴조했다.
에르도안은 지난달 알샤라 임시대통령을 앙카라로 초청해 세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튀르키예가 시리아 신정권에 지닌 큰 영향력을 활용해 시리아 중부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시리아군 훈련을 맡도록 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렇게 되면 전쟁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튀르키예의 움직임을 신경쓸 수밖에 없다.
튀르키예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집권세력인 하마스의 고위 인사 상당수가 거처로 삼고 있는 곳이며, 에르도안 대통령은 하마스 고위 인사들을 종종 만나고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이스라엘과도 연간 70억 유로(11조 원)에 이르는 상당한 규모의 교역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방패로 삼아 에르도안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압력을 무마하면서 국내 반발을 억눌러 종신집권을 노린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24일 "튀르키예 내의 혼란을 세계가 못 본 척 할 것이라는 데에 에르도안이 베팅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언론에는 재갈이 물려졌고 법원들도 통제되고 있으며, 23년간 집권 후 에르도안은 종신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워싱턴 근동정책 연구소의 튀르키예 프로그램 책임자인 소네르 카갑타이는 에르도안 정권의 야당 탄압에 대해 "글로벌 환경이 에르도안이 하고 싶은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쪽"이라며 "유럽이나 미국으로부터 의미있는 반발은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블룸버그통신에 설명했다.
limhwasop@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