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대응 대전환] ⑤ 목조 문화유산, 불나면 속수무책…"방재 대응 근간 바꿔야"

연합뉴스 2025-03-30 09:00:08

동시다발적 산불로 국가유산 피해 30건…고운사 보물 건물도 잿더미

방염포 명확한 기준·지침 없어…안전방재 연구 예산·인력 태부족

문화유산 전용 방화 구조물, 특허 냈지만…추가 연구·실험 '스톱'

화마가 휩쓸고 간 고운사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영남권 일대를 휩쓴 대형 산불로 수백 년 역사를 간직한 국가유산(문화재) 곳곳이 불에 타고 상처를 입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초비상이 걸렸고, '천년 고찰' 의성 고운사의 보물은 화마에 무너져 내렸다.

목조 문화유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화재에 특히 취약한 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을 잃지 않도록 국가유산 방재 대응 체계를 다시금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로 피해를 본 국가유산은 지난 28일 오후 5시 기준으로 총 30건이다.

이동 준비 중인 봉정사 아미타설법도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상황을 파악해 공식 보고된 사례만 집계한 수치다.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625∼702)가 만든 사찰로 알려진 의성 고운사는 이번 산불로 보물 연수전과 가운루 두 건물이 전소됐다.

1980년대 후반 임하댐 건설로 '이사'하는 아픔을 겪었던 안동의 옛 서당과 고택도 화마를 이기지 못했고, 영양 답곡리 마을을 지켜주던 만지송도 검게 그을렸다.

역대급 산불에 국가유산청은 국가유산 재난 국가위기 경보 수준을 가장 높은 '심각' 단계로 발령하고 총력 대응에 나섰으나, 피해를 막지는 못했다.

산불 위협에 이동 준비 중인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위기 경보를 '심각' 단계로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불이 잡히면서 걱정을 덜었으나, 방재 대응 곳곳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의성 고운사는 지난 24일 화선이 5.8㎞ 거리까지 근접하자 절 관계자들이 일부 유물을 옮기고, 연수전 등 주요 건물에 방염포를 설치했으나 사찰은 화마로 큰 피해가 발생했다.

사찰 관계자들은 거센 불길이 덮치기 전 보물 석조여래좌상을 겨우 빼냈지만,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 대좌(臺座)까지 옮기지는 못했다. 불상과 광배(光背·빛을 형상화한 장식물), 대좌까지 함께 보물로 지정돼 있다.

국가유산청은 봉정사, 고운사, 부석사 등 주요 사찰이나 종가가 소유한 유물 24건(1천581점)을 옮겼는데 이송 위치나 상태가 일부 뒤늦게 확인되기도 했다.

'고운사 석조여래좌상' 확인하는 최응천 국가유산청장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가유산 방재 체계를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5년 강원 양양에서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에서 큰 피해가 발생한 이후 국가유산 보호에 관한 경각심이 커졌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전문가들 중론이다.

건물이나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하는 방염포 또한 중요한 부분이다.

한때 소실됐다고 알려진 안동 만휴정이 무사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방염포가 관심을 끈 바 있다. 방염포는 불꽃이 닿아도 일정한 넓이 이상으로 불이 번지지 않도록 처리한 천을 일컫는다.

국가유산청은 "(난연 성능에 따라) 급수가 있으나 화재가 1천도 이상인 경우 10분 정도 버틸 수 있고, 500∼700도는 무제한으로 버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무진동 차량으로 옮겨지는 봉정사 유물

그러나 현장에서는 명확한 기준이나 지침이 없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소방 방재 전문가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단열재와 비교해 효과가 명확하지 않다"며 "무게가 무거워 긴박한 상황에서는 사실상 설치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만휴정에 설치한 방염포 모습을 언급하며 "처마 밑이 (외부에) 노출된 상태"라며 "부분적으로 가렸으나 벽에 덕지덕지 붙이는 방식은 (화재를 막는) 효과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화마가 휩쓸고 간 고운사

국가유산청은 이런 점을 고려해 최근 연구 사업을 진행 중이다.

세계산불연구학회 학술이사인 김동현 전주대 교수 연구팀은 건물 처마 끝단에 지지대를 설치하고 이를 토대로 방염포를 효과적으로 두르는 방법과 기준 등을 연구하고 있다.

대형 산불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해 사찰과 주변 산림 사이에 이격(離隔·사이를 벌려 놓음) 거리를 두거나 물을 뿌릴 수 있는 산불소화시설을 설치하는 방안 등도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국가유산 안전 방재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과 비교하면 현재 예산과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올해 문화유산 안전방재 기술개발연구 분야 예산은 3억8천700만원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지난해(4억4천500만원) 대비 13% 줄어든 금액이다.

방염포 덕분에 소실 피한 안동 만휴정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구·개발(R&D) 성과도 좀처럼 나오지 못하고 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2023년부터 대형 산불과 같은 화재로 인해 문화유산이 소실되거나 파손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문화유산 보호용 방화 구조물' 기술을 개발한 바 있다.

석탑 등 문화유산 주변에 설치하는 구조물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위로 올려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발됐다. 관련 기술 특허를 냈지만 추가 연구나 실험은 사실상 멈춘 상태다.

김동현 교수는 "문화유산은 불이 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한다"며 "응급 상황에 대처할 게 아니라 상시로 가동할 수 있는 (국가유산 방재)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가유산방재학회장인 백민호 강원대 교수 역시 "과거 방식으로는 지금의 재난에 대처하기 어렵다"며 "(국가유산) 방재 근간을 엎는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유산 보호용 방화 구조물 개념도

ye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