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문서] 민족감정 자극할라…계은숙 '日가요 디너쇼' 갑론을박

연합뉴스 2025-03-28 10:00:13

"대일감정 고려해야" vs "日문화 수용 계기"…공방 끝 허용

원조 한류가수 계은숙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지금은 K팝 가수가 일본어 노래를 발매해 현지에서 인기를 얻으면 국위 선양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물론 국내 음악 프로그램에서 일본어 가사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일본 대중문화가 금지돼 있어 정식 무대에서 일본 가요를 부르는 건 정부가 허가해야만 했을 정도로 상황은 달랐다.

외교부가 28일 비밀 해제한 1994년 외교문서에는 가수 계은숙이 '디너쇼'에서 일본 가요를 부르는 문제를 놓고 정부 내에서 갑론을박을 벌인 흔적이 남아있다.

1979년 데뷔 후 이듬해 MBC 10대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받은 계은숙은 1982년 돌연 일본으로 떠나 1990년대까지 일본에서 최고 가수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엔카의 여왕'이다.

발단은 당시 일본 최대 여행사 중 하나인 교통공사(JTB)가 1994년 2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그의 디너쇼를 기획한 것이었다.

일본인 관광객 800명을 관객으로 기획한 공연이었던 만큼 주최 측은 계은숙이 일본 가요를 부를 수 있도록 정부에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과거사 문제 등 주요 현안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 정서를 자극할 수 있다며 일본 대중문화 유입을 막고 있던 터였다.

국내 가수가 일본 가요를 공연하거나 일본어로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일본 가요를 한국어로 번역해 부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주일대사관은 일단 "국민감정을 고려해가면서 신중히 대처해야 할 사안"이라면서도 1994년 '한국 방문의 해' 성공과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적자로 돌아선 여행수지 개선을 위해 일본인 관광객 유치가 필요하다며 "긍정적 검토 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본부에 전달했다.

주일대사가 '일본 가요 공연 허가' 문제와 관련해 외교부에 보낸 공문

외교부 내에서는 견해가 엇갈렸다.

한일관계에 초점을 맞춘 아주국은 "국민 대일감정에 직결되는 사항"이라며 사안을 잘못 다룰 경우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신중론을 폈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처음 열린 1993년 한일정상회담을 계기로 새롭게 구축해나가는 양국관계의 좋은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반면 문화협력국은 '일본인 한정' 행사라는 점에서 전향적 의견을 냈다.

디너쇼가 국민감정에 대한 직접적 충격은 최소화하면서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시험해볼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방일을 앞둔 시점이었는데 "협상 카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최종적으로 당국은 디너쇼의 일본 가요 가창은 불허하는 대신 가을에 일본 대중문화 행사 하나를 허용하는 1안과, 일본가요 곡 수 제한 및 국내 가요 병행 가창을 전제로 디너쇼를 허용하는 2안을 놓고 저울질하다 후자를 택했다.

관광객만을 대상으로 하는 디너쇼를 불허하면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한다는 인상을 주어 문민시대의 자율화 추구에 역행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등의 의견이 검토 과정에서 힘을 얻은 것이었다.

일본 대중문화는 1998년 세계 4대 영화제 수상작을 시작으로 개방이 시작됐고, 공연은 1999년 2천석 이하 실내공연에 한해 허용한 뒤 이듬해 6월 전면 허용됐다.

as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