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이달 중순 조사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의 지지율은 29%였다. 여전히 낮은 지지율이기는 하지만, 불과 한 달 사이 8%포인트가 올랐다.
그 한 달 새 일어난 일은 이렇다.
4년여 남은 다음 총선 승리를 전제로 '국내총생산(GDP) 3% 수준으로 국방비 증액' 구상을 내놓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끈질기게 요구하는 유럽 자력 방어에 대한 호응이다.
지난달 27일 백악관을 찾아 트럼프 대통령에게 '역사적인' 두 번째 국빈 방문을 청하는 찰스 3세 국왕의 친서를 전달했고, 아름다운 영국 억양과 관세를 면제받으려는 열성을 칭찬받았다.
다음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에게 혼쭐이 나는 '백악관 참사'가 일어나자 젤렌스키 대통령을 바로 런던으로 맞아들여 기를 세워주는 한편,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전화를 걸어 중재에 나섰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전후 안보를 맡을 자발적인 국제 연합체 '의지의 동맹'을 추진하기로 하고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정상 회의, 군 수뇌부 회의를 연속해 열었다.
영국 해군 핵무장 잠수함 HMS 뱅가드에 올라 영국의 핵 버튼은 영국 총리의 손안에 있음을 과시했다. 영국의 핵 억지력이 미국과의 협력에 매여 있다는 지적이 나오던 때다.
이때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절모와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지팡이를 짚은 스타머 총리의 모습을 표지에 싣고 '윈스턴 스타머'란 글자를 박아넣었다.
윈스턴은 영국의 2차대전 영웅이자 대서양 동맹의 상징적 인물 처칠 총리의 이름이다. 백악관에는 처칠 총리의 동상이 있고, 처칠 총리가 연설에서 쓴 미·영의 '특별한 관계' 표현은 현재도 영국 정부 성명에 꼬박꼬박 쓰인다.
그러면서 스타머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은 물론이고, 트럼프 대통령과도 '의외의 콤비'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권 변호사, 검찰총장 출신으로 냉철하고 딱딱한 이미지의 스타머 총리가 개인적 카리스마를 내세우고 강경보수층의 지지를 등에 업은 트럼프 대통령과 성향과 스타일이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듯했으나 뜻밖에도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중도좌파 노동당의 색깔보다 영국의 국익을 우선시한다는 철저한 실용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을 늙은 대륙이라고 조롱하고 대서양 동맹을 무시한다 해도 뿌리까지 깊이 얽힌 미국과 갈라서는 것은 영국의 국익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유럽에 있는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선 탈퇴할지언정 유럽에서 떨어져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제와 안보 모두 그렇다.
그래서 스타머 총리는 "미국과 유럽 중 선택한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질문을 끝없이 받는다. 그에 대한 답변은 지난해 7월 총선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선택하라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답하는 이에게 달리 정답이 없는 것도 맞겠지만, 묻는 이들이 계속 묻는 이유도 있다. 타협이 되지 않아 선택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영국과 유럽 동맹국들에 대한 관세 위협을 멈출 조짐이 별로 없고, 미국이 직접 협상 상대로 삼은 러시아는 유럽이 바라는 종전 조건을 받아들일 기미가 없다.
국내 입지 측면에서도 호감도에서 비호감도를 뺀 순 지지율이 여전히 마이너스인 스타머 총리의 '인기'가 이대로 충분한지도, 얼마나 지속할지도 알 수 없다.
경제 부진, 이민 급증, 공공서비스 악화에 대한 불만은 여전히 높고 당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비판도 마다하며 복지를 꽉 조여 가고 있으나 곳간 사정은 여전히 빠듯하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주재 대사를 지낸 이보 달더는 "어느 순간 유럽과 미국의 갭이 너무나 커서 양쪽 진영에 모두 발을 두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리 혹스테이더는 이 말을 전하면서 "칼날 위를 걷는 위험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진다"며 "스타머 총리에게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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