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개인 모두 산불 실화자에 손해배상 청구 가능
실제 받는 배상금은 대부분 적어…배상액 감경 요인 때문
2019년 강원 대형 산불, 국가 소송도 27억원만 인정받아
(서울=연합뉴스) 박형빈 기자 = 영남권을 덮친 동시다발적 산불이 수일째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면서 화재를 낸 가해자의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까지 발화 원인은 경북 의성에서 묘지를 정리하던 성묘객의 실수, 경남 산청에서 잡초 제거 중 예초기에서 튄 불씨, 울산 울주에서 용접 작업 중 튄 불씨 등 개인의 과실에 의한 '실화'(失火)로 추정된다.
현행 산림보호법은 고의로 불을 낸 방화범뿐만 아니라 실화자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형사처벌과 별개로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도 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대형 산불을 낸 사람이 현실적으로 전액을 손해배상할 수 있을까. 이를 두고 수천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피해액과 복구 비용을 실제로 배상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 국가·개인 모두 산불 실화자에 손해배상 청구 가능
민법 제750조(불법행위의 내용)는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한다.
이번 산불을 일으킨 실화자들은 불이 번지지 않도록 주의할 의무를 다하지 않은 과실로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질 가능성이 있다.
산불이 장기간 이어져 인적·물적 피해가 누적된 만큼 손해배상의 범위도 넓을 수밖에 없다. 청구 주체도 정부·지자체 등 국가와 이재민을 포함한 민간인까지 다양하다.
법조계에 따르면 산림과 농지, 주택, 상가 등 재산상의 피해는 물론 사망자·부상자에 대한 인명 피해, 이재민의 정신적 피해에 따른 위자료 등도 배상 범위에 포함된다.
진화 작업에 동원된 소방 인력, 장비, 헬기 등의 운용 비용과 기타 공공 자원의 투입 비용도 실화자에게 청구될 수 있다.
이번 산불로 전소된 의성 고운사 소재 연수전, 가운루 등 국가 지정 보물이 문화재 보험에 가입돼있다면 보험사가 실화자를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할 수도 있다.
관계 당국은 산불이 완전히 진화된 후 합동 감식을 통해 정확한 화재 원인과 피해 규모를 파악할 예정이다.
2019년 4월 발생한 강원 고성·강릉·인제 산불은 산림 2천872ha(헥타르)를 태우고 1천289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켜 2천518억원의 피해액을 기록했다. 이번 영남권 산불 피해액 역시 수천억 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화자들에게 청구할 수 있는 금액은 소송을 제기하는 원고 측의 산출 기준에 따라 달라지며, 최종 배상액은 법원이 감정·심리를 통해 결정한다.
◇ 실제 받는 배상금은 적어…배상액 감경 요인 때문
실화자들에게 손해배상의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실제 국가나 개인이 받게 될 금액은 미미할 가능성이 높다.
민사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는 물건이 멸실된 경우 멸실 당시의 시가를, 훼손됐을 때는 수리 또는 원상회복에 드는 비용을 기준으로 따진다. 피해자가 주장하는 금액보다 법원이 산정하는 손해액이 일반적으로 낮다.
또 민법은 제765조(배상액의 경감청구)에서 '손해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에 의한 것이 아니고 배상으로 인해 배상자의 생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경우 배상액의 경감을 청구할 수 있다'고 정한다. '실화책임에 관한 법률'에서도 유사한 취지로 손해배상액을 줄일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대한 과실'은 약간만 주의한다면 쉽게 위법·유해한 결과를 예견할 수 있음에도 이를 간과한 '고의에 가깝게 부주의한 상태'를 뜻한다.
즉 실화자들이 최초 산불의 원인이 된 행동을 한 시점에서 이런 피해를 예견할 수 있었는지, 초기에 진화를 위해 노력을 했는지 등에 따라 감경될 여지가 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이들이 화재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결과론적으로 발생한 모든 피해를 부담할 수는 없다"며 "당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좋지 않은 기상 조건으로 불이 확산한 것으로 조사되면 과실상계 과정에서 (배상액이)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2019년 강원 대형 산불, 국가 소송도 27억원만 인정
2019년 12월 전남 화순군 야산에서 쓰레기를 태우다 산불로 번져 수목 638그루를 태운 남성은 임야 소유주로부터 1억3천400만원 상당의 소송을 제기당했지만, 항소심에서 1천260만원만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강원 고성·속초 일대에서 전신주에서 튄 불꽃으로 대형 화재가 발생했을 때도 한국전력공사(한전)의 배상 책임은 제한적이었다.
법원은 한전의 전신주 관리 부실 등으로 산불이 발생한 점은 인정했으나, 강풍 등 자연력과 지형이 불길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쳐 모든 배상 청구액을 부담할 필요는 없다고 봤다.
정부와 지자체는 한전에 37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2심을 마친 현재까지 27억원의 배상 책임만을 인정받았다. 이재민은 피해 감정액의 60%인 87억원과 지연손해금만이 인정됐다.
법원은 관련 판결문에서 "산불 발생 지역은 풍속이 빨라지는 구간이었고, 산불이 피고의 중대한 과실로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급속하고 광범위하게 확산한 원인 중에는 불에 붙기 쉬운 침엽수림이 인근 산간에 다수 있었고, 당시 건조주의보가 발효돼 삼림이 건조한 상태였으며 야간에 산불이 발생하는 등 진화에 차질을 빚은 원인도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이번 영남권 화재는 법원에서 배상액이 감경되더라도 실화자들이 배상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판결이 나더라도 배상명령을 이행하지 못 한 채 답보하거나 회생 또는 파산 신청을 할 가능성이 크다"며 "실제 피해 복구 비용과 보상은 재난지원금과 국비 등으로 국가가 부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binzz@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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