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술은 오랜 세월 동안 국민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며 익어 왔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곡식이 여물고, 그 곡식이 발효돼 술이 될 때, 당시의 많은 사람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삶을 적셔 왔다.
술은 음료가 아니라, 우리네 정서와 문화가 깃든 하나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또한, 흥과 한이 서린 시간의 결정체다.
탁주는 갓 빚어 걸쭉한 채로 마시는 술이다. 농부의 땀방울이 배어 있어 '농주'(農酒)라 불리기도 하고, 막 거른다고 하여 '막걸리'라 불리기도 한다. 그 맛은 투박하면서도 따뜻하며, 흰 빛깔 속에 들판의 노고와 풍요에 대한 기원이 녹아 있다.
청주는 탁주보다 정성 들여 빚은 술이다. 맑은 빛깔만큼이나 깊고 은은한 향을 지닌다. 약이 되는 술이라는 뜻에서 '약주'(藥酒)라 불리며, 잔을 기울일 때마다 그 속에는 장인의 손길과 정성이 서려 있다.
소주는 불로 증류해 얻은 술로 독하면서도 강렬하다. 고려 시대 이후로 널리 사랑받아왔다. 한 모금에 가슴을 태우고, 한 모금에 시름을 씻어 낸다.
시간이 흐르며 술의 종류도 변해 갔다.
서양에서 맥주가 들어오고, 새로운 술이 생겨났지만, 술을 향한 국민 다수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람들은 술잔을 기울였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잊고 싶은 것은 술에 띄워 흘려보낸다.
술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때로는 위로가 됐다. 지나간 시간을 불러오는 마법과도 같다.
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되는 것이 또한 술의 운명이다. 적당한 취기는 몸을 덥히고 마음을 가볍게 하지만, 지나친 술은 다음 날의 후회를 남긴다.
그런데도, 술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여전히 익어가고 있다. 한 잔의 술에 담긴 시간과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의 정(情)이 이어지는 우리의 문화다.
◇ 어머니의 옥수수술
필자가 어릴 적 제사가 다가오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옥수수술을 담그셨다. 묵직한 맷돌을 돌려 불린 옥수수를 곱게 갈며, 부엌 가득 퍼지는 고소한 향이 익숙한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아들아, 술은 비율이 중요하다."
어머니는 술을 담그기 전 늘 내게 말씀하셨다. 옥수수 열에 누룩 하나, 엿기름 하나, 그리고 우리 집 전통대로 쪄서 말려둔 솔잎을 반 정도 넣는 것이 나름 비법이다.
어린 필자는 이 말을 들으며, 마치 오래전부터 내려온 가르침을 전수하는 기분이 들었다. 부엌의 가마솥에 불길이 살아나면, 맷돌에 간 옥수수를 붓고 그 두 배 되는 물을 서서히 부었다.
수증기가 뿜어져 오르면 불길을 조절하며, 엿기름을 넣어 천천히 저었다. 너무 급하면 곰삭은 단맛이 덜 나오고, 너무 뜨거우면 술이 상한다고 어머니는 늘 불 조절을 신신당부하셨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흐르고, 땀이 이마를 타고 내릴 무렵이면 옥수수죽은 묽게 풀어졌고, 부드러운 단향이 피어올랐다.
이제 광 안 깊숙한 곳에 준비해둔 술독에 따를 차례였다. 솜이불을 여러 겹 감싼 독에 식힌 옥수수죽을 붓고, 곱게 빻아둔 누룩을 섞었다. 마지막으로 보자기로 단단히 덮어 숨구멍을 내고 뚜껑을 덮었다.
"이제 기다리면 된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기다림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독을 열어 조심스럽게 저어 주면, 묵직한 기포가 한 줄씩 떠올랐다.
발효가 한창 진행될수록, 광 안에는 술 익는 냄새가 퍼져 나갔다.
때로는 너무 차가운 날씨 탓에 발효가 더뎌지기도 했고, 너무 더운 날에는 어머니가 독을 살피며 술이 상하지 않았나 걱정스레 이마를 짚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 어머니와 술독을 들여다보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드디어, 술독을 여는 날이 왔다.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조리를 박아 맑은 술을 떠내셨다.
그 술은 새벽이슬처럼 투명했지만, 향은 깊고 은근했다. 이 술이 조상님들께 올려질 제사주의 역할을 하고, 남은 술은 삼베 보자기에 걸러 막걸리로 변했다.
필자는 바가지로 남은 청주를 떠 어머니께 건네고, 치받이에서 걸러지는 술을 바라봤다. 부드러운 거품이 일렁이며 하얀 막걸리로 변하는 순간, 어머니는 그제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술이 제맛이 났구나."
제사가 끝난 다음 날, 우리 집 사랑방에는 동네 어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어머니는 제사상에서 내린 음식을 정갈히 차려 내고, 어제 걸러 둔 막걸리를 항아리에 담아 내오셨다. 한 사발씩 마주하며 "이 집 술맛은 항상 최고구먼!" 하고 감탄하는 어른들.
그때야 어머니는 비로소 한숨을 돌리고 조용히 앉으셨다. 필자는 그 옆에서 익숙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날의 술맛은 어땠을까.
이젠 기억 속에서만 떠오르지만, 어쩌다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면 그때의 풍경과 어머니의 손길이 선명히 되살아난다. 마치 오래된 술독 속에 남은 깊은 향처럼, 어릴 때의 추억도 그렇게 가슴속에 익어가고 있다.
◇ 손자병법으로 본 술 빚기
손자병법 '화공의 장'에서는 불을 이용한 전술을 설명하고 있다.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활용해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화공'을 '요록'(要錄, 조선 시대 1680년경에 쓰인 저자 미상의 한문 요리책)에 기록된 다양한 약용 술이 각각 다른 효능을 가진 것에 비교해 본다.
손자는 불을 이용한 다섯 가지 유형의 공격 방법을 언급했다. 소인(燒人), 소적(燒積), 소치(燒輜), 소고(燒庫), 소대(燒隊)로 나눈다.
예로 적의 병사를 불태운다는 뜻의 소인은 칠일주, 일일주, 급주 등과 일맥상통한다. 단기간 내에 빠르게 효과를 내는 술처럼, 즉각적으로 적을 어지럽히고 전투력을 약화해야 한다.
식량창고를 불태운다는 뜻의 소적은 삼해주, 백자주, 감향주에 적용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식량을 없애 적을 고사시키듯, 체력을 보충하고 면역력을 키우는 약용 술이다.
수송 장비를 불태운다는 뜻의 소치는 송엽주, 송자주, 인동주 등과 연결된다. 전쟁에서 보급로를 끊는 것이 중요하듯, 술도 신체 순환과 해독 작용을 돕는 역할을 강조한다.
무기고를 불태운다는 뜻의 소고는 황하주, 황금주, 출주 등과 어울린다. 적의 무기를 파괴해 반격 능력을 없애듯, 술이 몸의 강한 자극을 줘 활력을 되찾게 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적의 진영을 불태운다는 뜻의 소대는 이화주, 벽향주, 하양주 등과 맞닿아 있다. 적의 진지를 불태워 혼란을 일으키듯, 신경계나 정신 건강을 안정시키는 술이다.
화공(火攻)과 약용주(藥用酒)를 비교해봤다. 위의 언급된 약용주는 모두 요록에 나와 있는 술이다. 이화주, 감향주, 백자주, 삼해주 등 다양한 종류의 술이 각기 다른 질병을 치료하는 데 쓰였다.
화공은 그저 표적을 향해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방향과 계절적 조건을 신중히 고려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약용주 역시 각각의 병에 맞는 약성을 지니고 있으며, 특정한 제조 방법과 복용 시기를 고려해야 효험이 있다.
손자는 "불길이 활활 타오를 때 공격해야 하고, 불이 꺼진 후에는 적의 반격을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약용주도 즉각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술(칠일주, 일일주, 급주 등)이 있지만, 오랜 숙성 과정이 필요한 술(삼해주, 자주, 황금주 등)도 있다. 전술적으로 즉각적인 화공과 장기적인 전술적 포위 작전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활용되는 것과 유사하다.
손자의 전쟁 철학과 약용주의 가치를 비교하면 손자는 불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기보다는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록에 등장하는 술도 기호품이 아니라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적절한 용량과 방법으로 사용해야 효과가 있음을 의미한다.
즉, 불을 다루는 것은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이지만 신중해야 하며, 술 또한 인간의 건강을 위해 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손자병법의 화공 전술과 악용주의 활용법은 본질적으로 적절한 사용법과 시기를 따져야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한국인의 음주 문화는 예(禮)와 정(情)을 담은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술을 마시는 순간에도 심신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어른을 공경하며 예의를 갖추는 것이 바로 주도(酒道)다.
술을 통해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면서도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예로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화합과 질서를 중시하며, 술자리를 통해 그 가치를 실천했다.
향약(鄕約)을 낭독하며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잔치를 벌였던 향음주례(鄕飮酒禮)가 대표적이다.
이 자리에서는 연장자가 먼저 술을 받고, 젊은이는 공손히 따르며 어른을 공경하는 예를 다했다. 이러한 술 예절은 한국인의 생활 속 깊이 스며든 도리(道)로 자리 잡았다. 손님을 맞이할 때도 술은 정(情)의 매개체가 된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아껴 뒀던 가양주(家釀酒)를 내놓거나, 정성을 담아 술을 준비해 대접한다.
상에 오르는 반주(飯酒) 한 잔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따뜻한 배려다. 주인은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밥을 권하며 나누는 식사는 단순한 음식의 교환이 아니라 정을 나누는 순간이 된다.
또 이별의 자리에서도 술은 하나의 정서로 작용한다. 떠나는 손님과 함께하는 이별주(離別酒)는 아쉬움을 달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소중한 예절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한국인의 술 문화는 전통을 잇는 동시에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K-Food'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듯, 한국의 정과 예를 담은 술 문화도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알려질 것이다.
술 한 잔에 담긴 따뜻한 마음, 서로를 위하는 배려와 예절이야말로 한국 술 문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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