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실패연구소가 분석한 '실패에서 배우는 법'…신간 '실패 빼앗는 사회'
저성장·양극화 시대에 자란 청년층, 도전 회피에 익숙
"실패로부터 학습하려면 실패 용인하고 배움 장려하는 문화 조성해야"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인도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에게 대실패였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누구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사를 바꿀 만큼 큰 역사적 진보를 이룬 사건으로 평가한다.
우리 삶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눈앞의 실수나 시행착오는 실패가 아닌 성공 혹은 성장의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이런 인식이 통용되지 않는다. 실패의 경험이 흔히 낙오자의 전유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화 속에서 나고 자란 청년층은 도전보단 안전한 길을 택하는 데 익숙하고, 또한 그런 판단이 합리적이기도 하다. 실패자라는 '사회적 낙인'을 피할 수 있어서다.
◇ "도전정신, 청년보다 베이비부머가 더 높아"
신간 '실패 빼앗는 사회'에 따르면 에릭 에릭슨과 로라 카스텐슨 등 발달심리학의 대가들은 청년기에 비해 중년기 이후에는 실패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도전을 회피하고 현상 유지와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설명한다.
이는 발달심리학 분야에서 널리 퍼진 보편적인 이론이며 또한 세상사의 이치와도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보편타당한 이 이론이 한국 사회에서 그대로 적용될까.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이런 대가들의 이론이 잘 들어맞지 않는 듯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실패연구소가 전국 남녀 1천500명을 상대로 진행한 대국민 도전 의식 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스스로를 도전적이지 않다'고 평가한 비율이 29.3%로 세대 중에서 가장 낮았다.
20대 초중반인 Z세대는 40.6%, 40대인 X세대는 44%였으며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인 Y세대는 50.3%로 이 비율이 가장 높았다. 즉, 베이비부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 있어 가장 적극적이고, 20~30대가 가장 보수적이라는 얘기다.
또한 베이비부머 세대는 '노력과 성실성' 외에 한국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요인으로 '도전정신', '자기 조절력', '긍정 마인드' 등 개인의 의지와 태도를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평가한 반면, 젊은 세대일수록 '타고난 재능', '가족 배경', '운과 기회' 등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요소의 중요성을 높게 봤다.
실패연구소는 이런 설문 결과에 대해 "발전과 성장을 직접 경험한 베이비부머 세대는 노력 중심의 성공관을 바탕으로 도전에 긍정적인 반면, 저성장과 양극화 시대를 살아온 청년 세대는 개인의 노력과 도전이 과거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느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 도전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데…실패 두려워하는 사회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시계'(Social Clock)를 엄격하게 지킨다. 사회적 시계란 진학, 취업, 결혼, 출산 등 특정 나이대에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과업을 의미한다.
실패연구소 설문 조사에 의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에 따라 그 시기에 해야 할 일을 해야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문장에 동의하는 비율이 응답자의 83.4%에 달했다. 이중 베이비부머는 십중팔구가, 20대인 Z세대 역시 열에 일곱이 그런 생각에 동의했다.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한국 사회 분위기가 이런 결정에 한몫했다.
응답자의 77.2%는 '한국 사회가 관대하지 않은 사회'라고 답했고, '한국 사회는 한 번 실패하면 낙오자로 인식된다'는데 58.2%가 동의했다.
특히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지원하기'(35.6%)보다 '무모하다고 여기고 무시하는 경향'(64.4%)을 보이며 '실패를 성장과 학습의 기회'(35.1%)로 보기보다는 '부끄럽게 여기고 비난'(64.9%)한다고 본다는 인식이 훨씬 우세했다.
실패연구소는 "한국인이 느끼는 실패감의 배경에는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태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 "실패 용인하고, 배움 장려하는 문화 조성해야"
안혜정 카이스트 실패연구소 연구조교수, 조성호 카이스트 전산학부 교수,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이처럼 "내 실패를 타인이 규정하는 사회" 속에서 "청년들이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 혹은 환상"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최근 출간된 '실패 빼앗는 사회'에서 이같이 주장한다. 책은 2021년 6월 설립된 카이스트 실패연구소가 3년 넘는 시간 동안 카이스트 학생들을 비롯해 학교 안팎 세대와 분야를 넘나들며 여러 사람을 만나 '실패에서 배우는 법'을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를 담았다.
저자들은 "실패를 용인하고 배움을 장려하는 문화에서는 실패로부터 학습이 활발하게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실패에서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시행착오를 통해 성공 확률을 높이는 것 이상의 의미다. 이는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경험을 통해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함께 성장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배움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관계 속에서 더욱 풍성해진다."
위즈덤하우스. 304쪽.
buff2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