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남편·자식 잃었지만…교육·항일 토대 구축한 선교사들

연합뉴스 2025-03-27 00:00:50

유관순 스승·여성 교육 어머니 '사애리시'·공주영명학교 세운 '우리암'

군산서 활동한 전킨·드루, 학교 세우고 의료 활동…근현대사에 영향

영명동산에 새겨진 사애리시 선교사의 연설

(공주·군산=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우리가 당한 고난이 크고 잃은 것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애리시(史愛理施)라는 한국 이름으로 유명한 앨리스 해먼드 샤프(1871∼1972) 선교사는 충남에서 복음을 전하던 남편이 사망한 지 반년 정도 지난 1906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선교사 회의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지난 25일 찾아간 충남 공주시 소재 공주영명고 영명동산에는 신앙으로 슬픔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젊은 여성 선교사의 119년 전 각오가 그의 얼굴 사진과 함께 비석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사애리시 부부를 기리는 공간

사애리시는 1900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해 이화학당 교사로 일하다 선교훈련원 동창인 로버트 샤프(1872∼1906) 선교사와 결혼했는데, 남편이 혼인 3년 만에 발진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전도를 마치고 돌아오던 로버트 샤프가 진눈깨비를 피하려고 들어간 초가에 하필이면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의 장례에 쓴 상여가 보관 중이었다. 상여를 만진 그는 병치레하다 34세에 요절했다.

미국으로 돌아가 2년가량 안식년을 보낸 사애리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자신의 연설을 실천이라도 하듯 남편이 잠든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교회에서 만난 한 소녀의 남다른 신앙심과 총명함을 눈여겨보고 그를 자신이 세운 영명여학교에 입학시켜 2년간 가르쳤다. 또 소녀를 수양딸 삼아 자기 집에서 기거하게 하고, 이화학당에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하도록 주선했다. 그 소녀는 바로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벌어진 독립 만세운동을 주동한 유관순(柳寬順·1902∼1920) 열사다.

공주영명고의 유관순 조각상

1940년 일제의 선교사 강제철수 조치로 쫓겨날 때까지 사애리시는 38년간 교육 선교에 헌신한다. 강경 만동여학교와 논산 영화여학교를 비롯해 충남 일대에 약 20개의 여학교를 세워 충청 근대 여성 교육의 어머니로도 불린다.

사애리시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후임자로 공주에 파송된 프랭크 윌리엄스(1883∼1962) 선교사도 근대 교육과 항일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사애리시 선교사

우리암(禹利岩)이라는 한국 이름을 쓴 윌리엄스는 1906년 10월 공주영명학교를 설립하고 30여년간 교장으로 근무했다. 아내인 앨리스 선교사는 같은 학교에서 수학과 음악을 가르치며 인재 육성에 함께 공헌했다.

윌리엄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몸 바치는 애국자 등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윌리엄스(우리암) 선교사

공주영명학교에서는 여러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1899∼1968)이나 그와 함께 1919년 4월 1일 공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노명우(1897∼1936) 등이 공주영명학교 재학생이었다.

여양현 공주영명중·고등학교 교장은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도 재학생들이 선배들의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여기도 있다며 "우리 학교 출신자 17명이 국가보훈부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라고 말했다.

윌리엄스 부부의 아들과 딸의 묘가 영명동산에 남아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다섯 자녀를 낳았는데 이 가운데 장남 조지 윌리엄스(1907∼1994)와 딸 올리브(1909∼1917)가 이곳에 잠든 것이다. 장남의 한국 이름을 우광복(禹光福)으로 지은 것에서 윌리엄스 부부의 철학을 유추할 수 있다.

이날 영명동산에 동행한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은 "(그의) 아버지·어머니는 조선이 빨리 일본에서 독립하라는 의미를 담아서 광복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유관순과 사애리시

다만 우광복의 복자를 '회복할 복'(復) 대신 '복 복'(福)으로 쓴 것은 조선 독립을 염원한다는 의도가 일제에 바로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우광복은 광복 후 미군정기에 군의관으로 한국에 파견됐다가 군정사령관 존 하지(1893∼1963)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그는 미군정과 한국인 엘리트 그룹을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했으며 이념 대립이 치열하던 정국에서 우익 주도 흐름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여동생 곁으로 보내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 일부가 영명동산에 모셔졌다.

'전킨·드루 선교사 군산 첫 선교지' 비석

전북 군산시에서는 초기 개신교 선교사인 윌리엄 전킨(1865∼1908·한국명 전위렴)과 알렉산드로 드루(1859∼1926·한국명 유대모)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24일 군산 수덕산 중턱의 전킨·드루 선교사 군산 첫 선교지 등에서 만난 서종표 군산중동교회 담임목사는 이들이 초가집 2채를 50달러에 매입해 포교원(교회)과 진료소(병원)로 사용했다고 전했다.

"전킨 선교사는 목사라서 포교원, 당시로 말하면 교회를 운영하고 드루 선교사는 의사라서 진료소 병원에 찾아오는 분들을 치료해주고서 예수님을 믿도록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드루는 외딴 마을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해 배를 마련해 고군산열도에서 강경까지 다니면서 전도와 의료활동을 병행했다.

1902년 무렵 전킨의 집으로 찾아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산수 등의 교육이 시작되고 이것이 군산영명학교로 발전한다. 전킨과 그의 부인은 물론 배재학당 출신으로 나중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오긍선(1878∼1963)이 이 학교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군산에 온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

군산영명학교 역시 항일 운동의 거점이 됐다. 박연세(1883∼1944)·이두열(1888∼1954) 등 이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1919년 3월 5일 벌어진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이다.

박연세는 이 사건으로 1년 넘게 수감생활을 했으며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거쳐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살다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중 순국했다.

한국에서 전킨의 삶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들 3명을 풍토병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고 서 목사는 전했다.

"돈을 벌러 온 것도 아닌데 그 고생을 하다가 전킨 선교사는 마흔세 살에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아들 셋을 이 땅에 묻고 그렇게 가셨습니다."

그럼에도 군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간직했다. 전킨은 "나는 궁멀 전씨다. 내가 죽으면 궁멀에 묻어달라"고 유언처럼 당부했다고 한다.

궁멀은 전킨이 설립하고 담임목사를 지낸 구암교회가 있는 군산 구암동의 옛 지명 중 하나다. 전킨이 사망한 곳은 전주였지만 그의 뜻에 따라 구암동에 매장됐다.

전킨을 기리는 비석

하지만 이후 묘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현재는 그의 유골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서 목사는 전킨의 묘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에 그와 부인 메리 등을 기리는 비석을 설치하고 작년에 제막했다. 미국에 있는 드루 선교사의 유골은 유족의 동의를 받아 조만간 이곳으로 모셔 올 예정이다.

개신교는 140년 전인 1885년 4월 헨리 아펜젤러(1858∼1902)·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가 내한하면서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확산했다. 1894년 이후 100년간 내한한 외국인 선교사는 3천명 수준이라고 서 회장은 전했다.

1945년 이전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는 1천500여명인데 사애리시, 윌리엄스 부부, 우광복, 전킨, 드루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선교사나 그 가족의 활동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sewon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