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후 10년 만에 연출…접대 골프 시작한 스타트업 대표 역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특전사 폭발물 처리반('백두산')부터 레바논 무장단체에 쫓기는 외교관('비공식작전'), 납치된 비행기의 파일럿('하이재킹'), 동생의 복수를 위해 맨몸으로 싸우는 전직 조직원('브로큰')까지.
배우 하정우의 최근 필모그래피를 보면 '고난 전문 배우'라는 그의 별칭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스크린 속 하정우는 때리고 맞고 쫓고 쫓기는 모습으로 익숙하다. 이 때문에 모든 역할과 연기가 비슷해 보여 아쉽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비스티 보이즈'·'멋진 하루'(2008)나 '러브픽션'(2012) 등을 통해 찌질하고 애잔한 캐릭터 역시 찰떡처럼 소화한 배우다. 유머러스한 대사를 태연하게 읊고 괜스레 멋쩍어하는 장면들이 소소한 웃음을 유발했다.
그가 감독 겸 주연을 겸한 '로비'에서는 오랜만에 이런 힘 뺀 연기를 만날 수 있다. 하정우가 '허삼관'(2015) 이후 10년 만에 내놓는 연출작으로, 국책 사업을 따내려 접대 골프를 시작한 스타트업 대표 창욱을 연기했다.
연구밖에 모르고 살던 창욱은 이른바 '로비력'이 달려 기술력이 떨어지는 옛 친구 광우(박병은 분)의 회사에 밀릴 위기에 직면하자 국토교통부 실세 최 실장(김의성)에게 접근한다. 평생 골프라곤 쳐본 적 없는 창욱이지만, 부랴부랴 골프와 아부를 익혀 라운딩 일정을 잡는다. 최 실장이 열렬히 사모하는 여성 프로골퍼 진 프로(강해림)와 로비에 일가견 있는 박 기자(이동휘)도 섭외해 동행하게 한다.
골프장 반대편에선 광우가 국토부 일인자이자 최 실장의 아내 조 장관(강말금)에게 공을 들이는 중이다. 그가 젊고 잘생긴 인기 배우 마태수(최시원)까지 동원해 조 장관의 비위를 맞추는 동안 골프장 대표(박해수)는 아내 다미(차주영)를 앞세워 그린벨트 해제 여부를 엿듣는다.
골프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블랙코미디는 황당하면서도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일 것 같아 쓴웃음을 자아낸다. 캐릭터 하나하나 리얼리티가 살아 있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다 자괴감을 느껴본 관객이라면 영화를 보는 내내 잊고 있던 흑역사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소재와 스토리는 가볍지 않지만, 말장난 가득한 대사의 향연 덕분에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지는 않는다. 하정우를 중심으로 한 배우진이 '말맛'을 잔뜩 살려 뛰어난 앙상블을 이룬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를 위해 모든 출연자가 모여 대본 리딩만 수십번을 거쳤다고 한다. 주·조연뿐만 아니라 성동일, 현봉식, 박경혜, 엄하늘 등 적은 분량의 배우들도 제 몫을 해낸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나 코미디에 그다지 득이 되지 않는 캐릭터가 눈에 띄는 반면 개성이 강한 캐릭터는 부족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사가 또렷하게 들리지 않아 웃음의 타율이 떨어지고 전개 역시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다음 달 2일 개봉. 106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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