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13년 만의 12집 '집중호우 사이'…한국적 서정 짙은 10곡 수록
"노래의 설득력에 끌려 평생 붙잡아…야만의 벽 돌파하는 지성·양식의 힘 생각하길"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우리나라 대표 포크 뮤지션인 정태춘(71)과 박은옥(68)이 다음 달 정규 12집 '집중호우 사이'를 발표한다.
부부 사이인 두 사람이 새 정규앨범을 내는 것은 지난 2012년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이후 13년 만이다.
정태춘은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 안에서 노래가 나왔고, 그걸 들려주고 싶었다"며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 하나였다"고 말했다.
지난 2019년 다큐멘터리 음악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인터뷰에서도 "이제 더 이상의 새 노래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한 그다.
정태춘은 우연히 밥 딜런의 가사를 접하다 그에 관한 방대한 자료와 작품을 들여다보게 됐고, 거기에 더해 레너드 코헨과 비틀스의 가사를 훑으면서 "다시 좋은 노래를 만들자"고 마음을 먹게 됐다고 한다.
그는 "밥 딜런을 만났다. 노래에 관심을 잃고 붓글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마포 도서관에서 본 밥 딜런 가사집을 주문해서 봤다"며 "밥 딜런의 수많은 텍스트, 정황, 이미지, 방대한 말에서 예술적인 영감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나도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전까지 나온 시, 메모, 붓글, 글을 훑어 보고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고 덧붙였다.
정태춘은 2022년부터 신곡 작업을 시작해 2023년 이 중 10곡을 녹음해 앨범을 내게 됐다.
이번 앨범에는 음반명과 같은 '집중호우 사이'를 비롯해 '기러기', '도리 강변에서', '엘도라도는 어디', '솔미의 시절' 등 총 10곡이 수록된다. 이 가운데 '민들레 시집'과 '폭설, 동백의 노래'는 박은옥이 불렀다.
앨범의 멜로디와 노랫말을 음미하다 보면 한국적이면서도 서정성 강한 시 같은 그의 작품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정태춘은 이번 앨범 발매를 계기로 "한국 문학에 진 빚을 갚고 싶다"고도 했다.
정태춘은 창작 공백기에 쓴 시와 단문, 원주 강변 마을·지리산·서울 송파와 마포 등 그간 거쳐 간 공간에 대한 소회를 모티브로 삼아 노래를 만들었다. 노랫말 곳곳에 상징이 묻어나고, 철학적 화두가 담겼다.
그는 '전쟁 같은 폭우 장마에 흐르는 주택가 / 멀리 포성과 섬광이 멎고 문득 지리멸렬해지면 / 그 갯벌 키 작은 갈대밭 붉은 다리의 어린 농게들이 / 질퍽한 각자의 참호에서 간지러운 햇살 기다리리라'(집중호우 사이)라면서 장마와 평화의 심상을 절묘하게 오갔다.
또 '떠나고 남는 사람들은 없단다, 다만 / 길이 여기저기로 흩어질 뿐'(도리 강변에서)이라고 철학적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정태춘은 "노래가 가진 힘과 설득력, 노래로 할 수 있는 말의 방법과 표현 방식에 매력을 느낀다"며 "노래는 문학의 다른 장르보다 특별한 소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노래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붙잡고 왔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노래를 부르는 일 말고 노래를 만드는 쪽이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박은옥은 "젊었을 때는 느껴보지 못한 '내가 노래하는 사람이라 너무 행복하다'는 감정을 나이 들어서 더 느낀다"며 "다시 태어나도 음악인이고 싶다. 다만 정태춘처럼 창작의 재능도 함께 가지고 태어나면 좋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지난 1978년 1집 '시인의 마을'로 데뷔한 정태춘은 시적인 가사와 토속적인 선율로 '시인의 마을', '촛불' 등의 노래로 사랑받은 싱어송라이터다.
그는 1980∼90년대 거리 집회 참여와 사회운동 성격의 순회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등으로 우리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저항을 표출했다.
그는 특히 1990년대 '아! 대한민국'(1990)과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 앨범으로 투쟁 서사를 써 내려갔다.
이 두 장의 앨범은 정태춘이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의 가요 사전 심의를 거부함으로써 당시 불법적으로 발매됐다. 이 저항은 이후 1996년 사전심의제도 폐지로 이어졌고, 그제야 이들 앨범은 정식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번 12집은 사회 고발적이었던 1990년대 작품들과 비교하면 문학성과 서정성에 방점이 찍혔다.
정태춘은 이에 대해 "사회 고발적이거나, 저항적이거나, 저항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노래는 도구적인 노래"라며 "나는 지금도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도구적인 노래를 쓰겠다. 그런 노래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현실의 구체적 삶들에 관해 관심을 집중하는 게 중요할 때가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문명·현대사와 전체 역사를 바라보는 것으로 관심이 변화했다"며 "우리 작은 공동체 안에서의 나의 삶에 대한 관심에서 '우주 속의 나는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관심이 변했다"고 설명했다.
정태춘은 "나의 어느 시대가 부끄럽거나 하는 것은 없다"며 "나는 내 생각대로 잘 변화해 왔다. 그리고 나의 변화가 좋았다"고 말했다.
이번 앨범은 정태춘과 박은옥의 2025년 문학 프로젝트 '노래여, 벽을 깨라'의 하나로 발매된다.
이후 5∼7월 전국 투어 '나의 시, 나의 노래'와 6월 붓글전 '노래여, 노래여'가 열린다. 정태춘의 노래 시집 '집중호우 사이'와 붓글집 '노래여, 노래여'도 출간된다. 1994년 한울출판사에서 발행된 노래집 '정태춘'·'정태춘 2'도 31년 만에 복간된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야만의 벽을 돌파하는 지성과 양식의 힘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노래의 벽을 깨라'라고 프로젝트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정태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울면서 드라마는 20대에서 60대까지 다 아우르며 감정을 전하고 마음을 흔드는데, 왜 노래는 그게 어려울까 하고 생각했어요. 어떤 세대에게는 BTS(방탄소년단) 노래가 당연히 더 와닿겠지만, 가끔은 우리 팬클럽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도 가입하기도 합니다. (우리 노래가) 소수라 할지라도 그 사람들에게 친구처럼 응원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박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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