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도안 '정적 제거' 역풍…대규모 거리 시위 속 야권 결집

연합뉴스 2025-03-24 12:00:18

수십만명 이스탄불 거리 뛰쳐나와 "독재 규탄"…곳곳서 경찰 충돌

'야권 대항마' 이스탄불 시장, 옥중 대선후보 선출…1천500만표 득표

佛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공격"…국제사회 여론 악화일로

이스탄불 시내에서 에르도안 규탄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튀르키예에서 22년째 장기 집권 중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71) 대통령이 최대 정적을 구금한 데 따른 역풍에 직면하게 됐다.

튀르키예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에크렘 이마모을루(54) 이스탄불 시장이 부패·테러 연루 등 혐의로 전격 체포된 지 닷새째인 23일(현지시간) 이스탄불 시청 주변에선 최소 수만 명이 운집, 에르도안 대통령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마모을루 시장의 부인 딜렉 카야는 연단에 올라 "그(이마모을루)가 당신(에르도안)을 쓰러뜨릴 것이다. 당신은 패배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에크렘이 직면한 불의는 모두의 양심을 울렸다. 에크렘에게 저질러진 일에서 모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직면했던 불의를 보았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기습적으로 연행된 이마모을루 시장은 이날 직무가 정지된 채 속전속결로 이스탄불 교외 실리브리 교도소로 이송됐다.

이마모을루 시장은 변호사를 통해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이런 건 사법 절차가 아니다. 이건 재판 없는 (정치적) 사형이다"라고 규탄했다.

앞서 그는 "우리는 우리 민주주의에서 검은 얼룩을 지울 것이다. 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끝까지 저항할 것이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가 소속된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은 이날 치러진 2028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마모을루 시장을 확정하면서 점차 야권도 결집하는 모양새다.

CHP는 비당원도 표를 던질 수 있는 개방형 투표로 진행된 이번 경선에서 이마모을루 시장이 1천500만표를 득표했다면서 "이중 1천321만1천표가 (비당원이) 연대의 뜻으로 투표한 것"이라고 밝혔다.

수도 앙카라에서 경찰과 충돌한 시위대가 튀르키예 국기를 들어보이는 모습

전국 81개 도시에서 진행된 이번 경선은 투표를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당초 예정했던 시간을 세 시간 반이나 넘겨서야 끝났다고 CHP는 덧붙였다.

튀르키예 검찰은 이마모을루 시장에게 테러조직으로 간주되는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 쿠르드노동자당(PKK) 등을 지원·협력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이마모을루가 이례적 지지 속에 제1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오히려 야권 결집에 불씨를 던진 형국이다.

이마모을루는 차기 대선에서 에르도안과 경쟁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야권 후보로 꼽혀왔다. 그런 그를 대선후보 경선 직전 구금해 야권의 구심점을 제거하려 했다는 게 이마모을루 측의 주장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2003년부터 22년 동안 장기집권해 온 점이나, 이슬람주의와 인기영합 정책을 내세워 국부(國父)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이 정립한 세속주의 원칙을 약화해온 데 대한 불만도 역풍이 더욱 거세진 배경이 됐을 수 있다.

이날 이스탄불 시청 인근에서 시위에 참여한 29세 남성 페르하트는 "(에르도안에 맞설) 강한 적수가 등장할 때마다 그들은 투옥됐다"면서 "튀르키예는 현재 독재 정권이 있을 뿐 다른 무언가가 없다. 정치는 이름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주요 대도시를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질 조짐을 보이자 튀르키예 정부는 집회 금지령을 내리고 소셜미디어 단속을 강화했다.

시위대에 물대포를 쏘며 해산을 시도하는 튀르키예 경찰

에르도안 대통령도 "거리의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강경진압 방침을 시사했지만 수십만명 이상이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튀르키예 주요 도시들에선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AFP 통신은 "이스탄불에선 경찰 기동대가 고무총탄과 최루액 스프레이, 진압용 수류탄을 사용했다. 수도 앙카라에선 물대포도 등장했다"고 전했다. 튀르키예 내무부는 전날 하루 동안 이스탄불에서만 323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튀르키예 당국이 법원 명령을 통해 튀르키예내 언론사와 기자, 정치인, 학생 등이 소유한 엑스 계정 700여개를 폐쇄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엑스 측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불법적' 조처라면서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프랑스 외교부가 규탄 성명을 내는 등 국제사회의 여론도 악화하고 있다.

프랑스 외교부 대변인은 23일 이마모을루 시장을 구금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공격"이라고 비판하면서 "(야권인사의 권리를 보호하겠다던) 약속을 존중하는 건 우리 관계뿐 아니라 튀르키예와 유럽연합(EU)의 관계에서도 핵심적 요소"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이스탄불 시위에 참가한 시민 아이텐 옥타이(63)는 AFP 통신 기자에게 이제는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이제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 이후에도 시위가 분명히 이어질 것이고,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권리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hwangc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