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연합뉴스) 백나용 기자 = 사흘 일정(3월14∼16일)으로 시작했던 제주들불축제가 태풍급 강풍으로 중도 취소된 후 지역 사회에서 논란이 또 불거질 전망이다.
'불을 놓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올해 들불축제는 '불' 없는 축제로 첫선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허무하게 중도에 막을 내리면서 디지털 전환의 성과는 검증하지 못했고, 논란도 털지 못했다.
◇ 제주 옛 목축문화 재해석한 관광축제
제주들불축제는 1997년 '정월대보름 들불축제'로 시작됐다.
소와 말 등 가축 방목 전 해묵은 풀을 없애고 해충을 구제하기 위해 마을별로 불을 놓았던 제주지역 옛 목축문화인 '방애'를 재해석하고 정월대보름 소원 빌기 의례 등을 계승하는 목적으로 개최됐다.
초기 축제는 제주 북부지역 마을 공동목장 등에서 일정한 개최지 없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열렸다.
그러다 새천년을 맞이한 2000년부터 제주시 애월읍 새별오름에서 고정적으로 축제를 열게 됐다.
축제 개최 시기도 음력 1월 15일 정월대보름에 맞춰 열리다 해마다 꽃샘추위와 비바람 등 악천후로 인해 축제 하이라이트인 '오름 불놓기' 행사에 차질이 빚어지자 2013년 제16회 축제부터 경칩이 속한 주말에 열리게 됐다.
그때부터 축제 명칭도 '정월대보름 들불축제'에서 '제주들불축제'로 바뀌었다.
그런데 축제 시기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면서 건조한 날씨 속에 산불 위험성이 높아졌다.
실제 2022년 전국적인 산불 재난 상황으로 들불축제가 전면 취소됐고, 2023년에는 행사 도중 산불 경보 발령에 따라 불 관련 프로그램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름 불놓기'가 환경오염 문제와 맞물려 논란의 중심이 됐다.
새별오름 남쪽 경사면 26만㎡ 억새밭에 인화성 물질을 사용해 불을 놓고, 동시에 2천발의 불꽃을 터트리는 행위가 지구 온난화와 기후 위기 주범으로 꼽히는 탄소 배출을 심화한다는 것이다.
2023년 4월 제주녹색당이 도민 749명의 서명을 받고 주민참여 기본조례를 근거로 오름 불 놓기 폐지에 나섰고 두 달 뒤 들불축제 숙의형 원탁회의 운영위원회가 조직돼 들불축제 향방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들불축제 숙의형 원탁회의 운영위원회는 같은 해 9월 발표한 권고안에서 "오름 불놓기를 테마로 한 제주들불축제는 '생태적 가치'를 중심으로 '도민참여'에 기반을 둔 '제주시민이 함께하는 축제로 재탄생'해야 한다"며 "기후 위기 시대에 도민과 관광객의 탄소배출, 산불, 생명체 훼손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대안을 조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이 권고안을 받아들인 제주시는 앞으로 들불축제에서 탄소배출 등 우려가 있는 '오름 불 놓기'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생태적 가치에 부합하는 새로운 콘텐츠 개발에 집중하겠다며 2024년 제주들불축제를 개최하지 않았다.
◇ 허무하게 끝난 축제, 방향성 논쟁 계속될 듯
2년 만에 다시 열린 올해 들불축제는 전면 '디지털'로 기획됐다.
축제 하이라이트인 오름 불놓기는 양방언을 비롯한 아티스트 공연에 미디어아트를 결합한 '디지털 불 놓기'로 대체됐다.
당초 제주 목축문화를 상징하는 달집태우기와 횃불 대행진은 유지될 예정이었지만, 축제 한 달 전 '디지털 불빛 쇼'로 전환됐다.
완전히 '불' 없이 치러지는 축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축제 이틀째 제주에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새별오름 일대 행사장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고, '디지털 불빛 쇼'는 제대로 시연해 보지도 못한 채 축제는 막을 내렸다.
어쩔 수 없는 기상악화 탓이라 해도 축제 취소에 따른 후폭풍은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특히 3일간 예정된 행사 중 이틀 치가 취소되면서 인적·물적 피해가 막심하다.
23일 제주시에 따르면 올해 들불축제에 투입된 예산은 18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이 중 15억원(83%)은 지역업체와의 계약으로 행사가 모두 마무리되면 계약 금액을 정산하는 방식이다.
축제는 제대로 치르지 못했지만 예산은 대부분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불 놓기'와 '복합 미디어 아트쇼' 등 축제 주요 프로그램 계약이 천재지변 등으로 행사하지 못하더라도 비용을 지급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또 축제장 기반 시설 조성, 셔틀버스 운영, 홍보물 제작 등에도 이미 비용과 인력이 투입됐다.
제주시는 "천재지변 시 업체마다 계약 조건이 다르다"며 "계약 조건 등을 면밀히 살펴보며 정산을 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읍면동 자생 단체 단위에서도 이번 축제와 관련한 손해액이 발생해 저마다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도의회도 골머리다.
제주도의회는 지난해 10월 432회 본회의에서 애월읍 주민 1천283명이 청구한 '정월대보름 들불축제에 관한 조례안'(오름 불 놓기)을 통과시켰다.
이 조례는 환경파괴 논란이 됐던 '오름 불놓기' 행사 진행 여부를 지자체장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전국적인 산불경보 발령 또는 기상 악화 등으로 행사를 정상 개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개최 시기나 기간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는 해당 조례안이 상위법인 '산림보호법'과 '제주도 축제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와 배치된다며 같은 해 12월 재의 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사실상 '오름 불놓기'에 부정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올해 축제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버리면서 어쩌면 큰 잡음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해당 조례안은 또다시 쟁점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제주도의회는 규정상 해당 조례를 다음 달 4일 열리는 본회의에는 상정해 표결에 부쳐야 한다.
재의 요구된 조례는 도의회 본회의(과반수 출석)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어야 공포가 가능하다.
환경오염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축제 때마다 기상이 변수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예산을 들이고도 할 수 있을지 말지도 모를 오름 불놓기가 계속 호응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무엇보다도 들불축제가 앞으로도 '불'이 아닌 '빛'을 활용한다면 방향성을 결정해야만 한다.
'들불축제의 명맥을 이을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축제로 키워 나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들불축제와 관련한 기사에는 "명칭은 들불축제인데 내용은 빛 축제, 앞뒤가 안 맞는다", "정체성도 없고, 콘셉트도 없다"는 내용의 댓글이 줄을 잇고 있다.
기상 악화로 벌써 최근 5년간 3번이나 축제 운영에 문제가 발생했던 만큼 개최 시기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고태민 제주도의회 문화관광체육위원장은 "전통과 현대 축제가 균형을 이루면서 공존할 수 있도록 행정의 역할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며 "제주들불축제가 진정한 의미에서 제주 고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축제로 발전할 수 있도록 운영 방향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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