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이, 화이' 배지영 작가 "서로 미워하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

연합뉴스 2025-03-23 09:00:04

멸망 이후 세계에 둘만 남은 '비호감' 남녀 다룬 장편소설

장편소설 '담이, 화이' 발표한 배지영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강한 지진과 함께 거의 모든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세상을 뒤덮은 시체들은 어째서인지 쉬지 않고 좀비처럼 걸어다닌다. 이 멸망한 세상에 오직 '담'이란 이름의 남성과 '화이'라는 여성만 살아남는다.

배지영 작가의 장편소설 '담이, 화이'는 멸망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이면서 동시에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 대한 오마주다.

두 주인공의 이름 역시 아담, 하와에서 비롯됐고, 성경에서 천지창조에 7일이 걸렸듯 이 소설도 총 7장으로 이뤄져 있다.

종말을 다루는 동시에 세상의 시작을 연상케 한다는 점 말고도 이 이야기에는 독특한 점이 하나 더 있다. 서로 믿고 의지해도 모자랄 두 주인공이 서로를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싫어한다는 점이다.

지난 21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작가는 "태초의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좋아하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독특한 설정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아담이 먼저 창조됐고, 뒤늦게 나타난 하와를 상대로 '꼰대'처럼 굴었을 것 같다"며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게 된 걸 두고 아담은 하와를 원망하게 됐을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담이, 화이' 책 표지 이미지

세상에 단둘이 남은 남녀가 서로 미워한다는 설정은 단순히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름답고 비범하고 뛰어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사실 세상을 채우고 있는 사람 대부분의 평범한 모습은 조금씩 모자라고 비뚤어져 있다. '담이, 화이'는 못난 주인공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같은 사실을 독자에게 환기한다.

담과 화이는 모두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하고 외모도 수려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담은 하수도 준설원, 화이는 백화점 지하주차장 안내요원으로 모두 지하에서 일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담은 자기 고집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강요하고 과장된 자의식으로 위축된 자존감을 포장하는 인물이다. 화이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가짜 명품을 몸에 두르는 허영심으로 가득한 인물로 그려진다.

지진으로 대부분 사람이 죽은 뒤 시체들이 마치 좀비처럼 쉬지 않고 걸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 그저 기이한 모습으로 떼를 지어 계속 걷기만 할 뿐이다.

담은 이런 시체들을 모아서 불태우는 일을 쉬지 않고 반복한다. 그는 자신이 걷는 시체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한 일종의 종교적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담은 우연히 백화점 옥상에 있는 화이를 만나고, 자기가 발견한 안전하고 쾌적한 집에서 화이가 지내도록 해 준다.

담은 화이 역시 자신과 같이 시체를 치우고 세상을 더 쾌적하게 만드는 일에 매진하기를 바라지만, 화이는 별로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담에게 넌덜머리를 낸다.

둘은 잘 지내려다가도 다투고, 다시 화해했다가도 금방 또 사이가 틀어진다. 화이는 첫 만남부터 담의 입 냄새를 견디기 힘들어하고, 우연히 가까이 다가온 담의 앞에서 무심코 숨을 꾹 참는다. 그런 화이의 모습에 담은 모멸감을 느낀다.

배지영은 "싫은데도 참아주는 것, 그게 갈등을 오히려 극대화한다고 생각한다"며 "서로를 참고 견디는 관계가 되면 인간은 갈등하고 반목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갈등의 가장 큰 문제는 참는 게 아닐까 싶어요. 관계에서도 참는 건 결국은 순간일 뿐이고, 결국 참는 순간이 반복되다 보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고 말죠."

장편소설 '담이, 화이' 발표한 배지영

배지영은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오란씨'가 당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오란씨', '근린생활자'와 장편소설 '링컨타운카 베이비', '안녕, 뜨겁게'를 펴냈다.

'담이, 화이'는 배지영이 2019년 '근린생활자'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이다. 작년 출간 예정이었던 이 책은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치며 독자들과 만나는 날이 다소 늦어졌다고 한다.

배지영은 "지금까지보다 작품을 더 많이 내고 싶다"고 말했다. 일단 올해 안에 '근린생활자' 속 단편소설인 '그것'을 장편으로 확장한 이야기를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jae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