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지나간 장면도 다시 보면 다르다…'폭싹'의 치밀한 디테일

연합뉴스 2025-03-23 09:00:04

'폭싹 속았수다', 시대상 반영 장면들로 추억 소환…'오나타'·자개장 등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서울=연합뉴스) 오명언 기자 = "내 차가 오나타냐고. 한문 선생님 차는 폰이에요 폰,"

곱게 차려입고 학부모 면담을 위해 학교를 찾아온 애순(문소리)을 본 담임 교사는 그를 교무실이 아닌 주차장으로 데려간다.

아들 은명(강유석)이 주차장에 세워진 교사들의 차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된 애순은 푹 고개를 숙이고 만다.

담임 교사의 쏘나타(SONATA) 차량 엠블럼은 'S'가 빠져 '오나타'가 됐고, 한문 교사의 포니(PONY)에서는 'Y'가 없어져 '폰'이 됐다. 심지어 교장의 스텔라(STELLAR)도 'S'를 도둑맞아 '텔라'가 돼버렸다.

세대를 넘나드는 공감을 얻으며 화제 몰이 중인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장면들로 시청자들의 추억을 소환하고 있다.

은명이 학교 교사들의 차량 엠블럼에서 'S' 등을 떼다가 주변 학생들에게 나눠준 장면은 1990년대 후반 유행했던 미신을 소재로 활용했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당시에는 한창 'S' 엠블럼을 갖고 있으면 서울대에 간다는 소문이 입시생들 사이에서 퍼져, 대로변이나 주차장에서 '오나타'가 된 쏘나타 차량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드라마에는 서울대에 입학한 금명(아이유)이 동생에게 선물 받은 듯한 'S' 엠블럼을 학교 교재를 묶는 고무줄에 붙여 들고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어렸을 때 부촌 아파트를 가로질러 학교에 다녔는데, 주차장에 차량이 죄다 오나타였던 기억이 난다", "나도 고등학교 3학년인 친언니한테 'S' 엠블럼을 떼줄까 말까 고민했는데 오랜만에 추억 돋는다", "구하려고 해도 이미 동네 자동차들은 다 'S'가 이미 떼진 상태였을 만큼 유명했었다" 등의 추억을 되짚는 반응이 나왔다.

토속적이고 가부장적인 1960년대 제주도의 시대상을 반영한 디테일도 곳곳에 녹아있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애순의 시댁에서 남자와 여자들의 밥상은 따로 차려지는데, 남자들이 먹는 상에 놓인 국은 건더기가 푸짐하고 반찬도 다양하다. 반면, 여자들은 그 옆의 작은 상에 둘러앉아 생선 대가리와 탄 밥, 국물만 흥건한 국을 먹는다.

애순이 딸 금명을 잠녀(해녀)가 되게 하려는 시할머니한테 맞서서 상을 뒤엎기 전에 나오는 짧은 장면에도 의미가 숨겨져 있다.

마당에 있던 애순은 금명을 데리러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애순이 댓돌에 신을 벗자 시할머니는 이를 못마땅해하며 곧바로 내려놓는다.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던 당시 제주도에서 여자의 신을 댓돌에 못 올려두게 하는 문화를 녹여낸 것이다.

이처럼 '폭싹 속았수다'는 스쳐 지나가듯이 보여준 장면에서도 시대적 배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몰입감을 높였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애순과 관식이 양배추와 생선을 팔던 시장 골목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국화빵을 파는 한 할머니를 비춘다. 전쟁의 상흔이 깊었던 1960년대 시대상을 반영하듯 할머니는 "피란 실종 찾습니다. 출생: 평안도 진남포. 함길태 12세"라고 크게 적은 팻말을 목에 걸고 있다.

1980년대 후반, 관식이 중년의 나이가 됐을 때의 사회 분위기도 디테일하게 담아냈다.

관식이 대학에 다니는 딸 금명을 보러 서울에 올라온 날은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87년 12월 16일이다. 드라마는 두 사람이 버스 터미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벽에 걸려있던 시계를 보여준다. 시계는 오후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이때 버스 터미널 대기실 TV에는 노태우 후보가 대선에서 1위로 앞서고 있다는 내용의 뉴스가 흘러나온다. 실제로 당시 노태우 후보가 투표일 오후 11시부터 1위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을 반영한 장면이다.

이 밖에도 이승만 정권을 경험한 애순이 "나중에 크면 대통령도 다섯번 해 먹겠다"고 말하는 대사나, 애순의 반 아이들이 만기 아버지가 준 양초로 마룻바닥과 창문을 닦는 장면,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자개장을 집에 들이고 행복에 겨워하는 애순의 모습 등도 동시대를 살았던 시청자들에게는 반가운 장면이다.

연출을 맡은 김원석 감독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한 인터뷰에서 "'폭싹 속았수다'는 시대적인 상황이 캐릭터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요컨대 시대가 빌런(악당)인 드라마"라며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할수록 캐릭터와 스토리가 더 잘 표현되고 공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점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했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coup@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