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푸른 눈의 한국인'이 만든 문화유산

연합뉴스 2025-03-22 08:00:03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씨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미국 해군 정보장교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는 1945년 광복과 동시에 그해 9월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미군정청에 부임했다가 한국의 자연과 인심에 이끌려 한국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57년간 한국에서 살면서 충남 태안 천리포 일대의 민둥산을 가꿔 '서해안의 푸른 보석' 천리포수목원으로 탈바꿈시킨 민병갈(한국명)이 된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천리포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여름이면 휴가차 만리포해수욕장을 즐겨 찾곤 했는데 1962년 여름에도 만리포해수욕장 근처 천리포를 산책하다가 전부터 안면이 있던 한 마을 노인을 만났다. 그로부터 간절한 부탁 하나를 받았다. 과년한 딸의 혼수비용이 필요하다며 바닷가 야산 6천평을 사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산 땅이 18만평 규모 천리포수목원의 모태가 됐다.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나무를 심어 식물원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이후 계속 부지를 확장해 종국에는 1만7천여종의 식물 등이 살고 있는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세계 12번째이자 아시아 최초로 국제수목학회의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 인증도 받았다. 천리포수목원 측은 "식물 전문가도 아닌 그가 국제적인 수목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식물에 대한 열정과 노력,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천리포수목원에 있는 민병갈 설립자 흉상

그는 1979년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서양인 최초 귀화 한국인이다. 2002년 4월 운명하는 날까지도 한국과 나무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 "나 죽으면 묘 쓰지 마세요. 그럴 땅에 나무 한 그루 더 심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식물원 측은 차마 유언을 따르지 못하고 그의 묘를 만들었다가 2012년 10주기 때에서야 수목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이 국가문화유산에 오를 것이라고 한다. 국가유산청은 '태안 천리포수목원 조성 관련 기록물'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할 예정이라고 이달 18일 밝혔다. 등록 예고된 기록물에는 민병갈 씨의 식물 채집·번식·관리 일지 등이 포함됐다. 한국과 한국의 자연을 사랑한 '푸른 눈의 한국인'의 평생 노력이 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 날이 머지않았다.

bond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