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공연…가장 모차르트다운 연주와 디테일 풍성한 연출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와 마찬가지로 공연 시간만 3시간 걸리는 긴 오페라다. 백작의 하인 피가로가 온갖 방해를 뿌리치고 마침내 원하던 결혼식에 도달하기까지 하루 24시간의 사건 전개를 그렸다. 음악도 드라마도 흥미진진하지만 극 중에서 밤이 되어 무대에 어둠이 짙어질수록 관객들의 눈이 조금씩 감기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국립오페라단이 시즌 개막작으로 지난 2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린 '피가로의 결혼'은 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음악과 무대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관객들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이자 상임지휘자인 다비트 라일란트가 4막 피날레의 마지막 악구를 폭발하는 듯한 박진감으로 마무리하자 열렬한 환호와 갈채로 화답했다.
이번 프로덕션의 무대·의상 디자인을 담당한 피에르 요바노비치는 '피가로의 결혼'이 하루 사이에 진행되는 극이란 점에 착안했다. 무대 배경에 먼 언덕의 윤곽선들을 겹겹으로 채색해 그려 넣고 아침에서 밤에 이르는 자연광의 변화를 조명 디자이너 마선영의 효과적인 조명으로 표현했다. 언덕의 색은 시시각각 아름답게 변해갔다. 백작의 저택은 무대 회전을 통해 수잔나의 방, 백작 부인의 작업실, 백작의 집무실을 차례로 선보인다. 이와 함께 요바노비치는 저고리, 매듭 등 한국 전통의상 요소들에 20세기 초반 유럽 패션 스타일을 조합한 개성 있는 의상들을 선보였다. 극이 진행되면서 인물들이 새로운 옷을 레이어드로 덧입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영감을 얻어 "주인과 하인이 한 공간에서 마주치지만,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거리가 존재한다"는 현실 비판을 '피가로의 결혼'에서 보여준 연출가 뱅상 위게는 원래 18세기였던 원작의 시대적 배경을 1920~30년대로 옮겼다. 보마르셰 '피가로 3부작' 중 1부인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당차고 독립적이던 로지나의 이미지를 살려 연출가는 백작 부인 로지나를 가브리엘 샤넬 같은 당대 유명 패션디자이너로 설정했다. 남편 알마비바 백작은 이 패션 브랜드의 최고경영자(CEO), 하녀 수잔나는 수석 디자이너다. 2막에서 남편의 바람기를 한탄하는 첫 아리아를 노래하며 디자인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로지나는 영감이 고갈되어 위기에 처한 예술 창작자로 등장한다. 설정 자체는 흥미롭고 참신했지만, 이런 내용을 관객이 설명 없이도 이해하려면 더 치밀하고 복잡한 연출상의 장치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다소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연출가 위게는 다채로운 아이디어를 활용한 풍성한 디테일로 3시간 내내 관객이 무대와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지휘자 라일란트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가장 모차르트다운 연주로 '피가로의 결혼'의 진수를 보여줬다. 초반에 예상하지 못 한 호른의 실수로 잠시 놀라긴 했겠지만, 지휘자는 서곡부터 마지막까지 한순간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밀도 있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약간 빠르게 설정한 템포는 음악의 활력과 에너지를 더욱 강렬하게 지속시켰고 피아노와 포르테 그 어떤 부분도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악기군 간의 밸런스뿐만 아니라 성악 음량과 오케스트라의 밸런스도 적절하고 만족스러워 관객 역시 음악에 오롯이 몰입할 수 있었다.
주역 가수들의 기량도 한결같이 뛰어났다. 베를린 도이체오퍼의 솔리스트로 활약 중인 베이스바리톤 김병길의 피가로가 보여준 뛰어난 성악적 표현력과 연기력, 이상적인 수잔나의 음색과 가창력을 지닌 소프라노 이혜정, 품위와 야비함을 적절히 조화시킨 바리톤 양준모의 유연한 백작, 고통과 기쁨의 음악적 표현 변화에 능한 소프라노 홍주영의 백작 부인, 메조소프라노 라헬 브레데의 매혹적인 케루비노 등 모두가 적역이었다. 훌륭한 합창과 함께 복잡한 군무를 유쾌하게 소화해낸 국립합창단도 이번 공연의 수준을 더욱 높였다.
"단두대가 필요하지 않은 유머와 욕망의 혁명". 이번 '피가로의 결혼'을 위한 연출가의 이 모토를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성악진과 합창단은 제대로 뒷받침해줬다. 고전주의적 조화와 균형 및 절제를 유지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음악을 만드는 것. 모차르트 오페라 연주자들의 가장 핵심적인 이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연주였다. 공연은 두 캐스트로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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