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유럽 당국자들 "강한 압박 받고 있지만 포위 상태 아냐"
CIA 등 보고에도 트럼프는 주장 고수…"조기종전 박차 목적" 관측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러시아 쿠르스크 전선에서 퇴각 중인 우크라이나군이 사방으로 포위돼 전멸 위기에 놓였다는 미국과 러시아 양국 정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로이터 통신은 2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 대한 정보기관 분석 결과를 잘 아는 익명의 미국과 유럽 정부 당국자들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쿠르스크 전선의 우크라이나군이 강한 압박을 받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러시아군에 완전히 포위됐다는 건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을 비롯한 미국 정보기관들은 이런 평가를 지난주 백악관과 공유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에도 우크라이나군이 포위됐다는 주장을 이어갔다고 이 당국자들은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14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전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고 밝히면서 우크라이나군 수천명이 완전히 포위돼 '학살'될 처지에 놓였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푸틴 대통령에게 그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고 밝혔으며, 곧바로 푸틴 대통령은 쿠르스크의 우크라이나군이 항복하면 생명을 보장하겠다고 화답했다.
정작 우크라이나 측은 포위된 병력이 없다는 입장이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이런 입장은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으려는 것일 수 있다는 관측을 낳았지만, 실제로는 정말로 포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게 로이터 통신이 취재한 당국자들의 주장이다.
서방측 전문가들도 우크라이나 측 대규모 병력이 포위된 정황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오픈소스 정보를 바탕으로 전황을 전달해 온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14일 "쿠르스크주는 물론 우크라이나 내 전선 어디에서도 러시아군이 많은 수의 우크라이나군을 포위했다는 걸 시사할 지리적인 흔적이 관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7일 워싱턴DC 케네디센터에서 취재진에게 푸틴 대통령과 재차 통화할 의향을 밝히면서 우크라이나군이 "사실상 포로로 잡혀 있고 포위돼 있다"고 말했고, 이튿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서방측 전문가들은 푸틴 대통령이 휴전 협상에서 우위에 설 목적으로 우크라이나군을 포위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유럽 동맹국들과 국내 일각의 반발에도 우크라이나 전쟁 조기 종전을 밀어붙이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도 러시아 측의 이러한 주장을 부정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마크 캔시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 고문은 "이건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기고 있고 저항해도 소용없다고, 더 강한 러시아가 승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강조하려는 푸틴의 노력의 일환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은 트럼프의 반응을 끌어냈다"면서 "양측 모두가 협상에서 더 나은 위치에 서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당장 포위돼 대규모 인명 피해에 처할 상황은 아니라지만 쿠르스크의 우크라이나군이 어려운 상황에 놓인 건 사실로 보인다.
러시아군에 국토의 20%가량이 점령된 우크라이나는 국면 전환을 위해 작년 8월 기습적으로 국경을 넘어 러시아 쿠르스크주에서 한때 1천300㎢에 이르는 땅을 손에 넣었지만, 지금은 점령지가 80㎢ 정도로 쪼그라든 상황이다.
쿠르스크의 우크라이나군이 포위되지 않은 상태라는 로이터 보도와 관련한 질의에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는 즉답을 피했다. 백악관과 CIA, 국가정보국(DNI) 등도 답변을 거부한 상황이라고 로이터는 덧붙였다.
hwangc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