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갚을 능력 없는데 채권 풀면 사기…결심 시점 두고 '의혹 분분'
신용등급 강등은 채권발행 결격사유 안돼…회생신청 단행 경위가 관건
비중 큰 유동화증권 발행주체 홈플 아닌 증권사…책임소재 불분명 논란
(서울=연합뉴스) 김태균 기자 = 책임 공방이 뜨거운 홈플러스 단기채권 사태의 핵심 쟁점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결심 시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 법에서 기업회생을 결심하고 채권을 발행하는 것은 범죄다. 빚을 갚지 못할 상황이 닥칠 것을 알면서 돈을 빌리는 사기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금융채무가 동결되는 회생을 마음먹고도 채권을 팔았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홈플러스와 소유주인 사모펀드 운영사 MBK파트너스는 도덕적 타격은 물론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반면 홈플러스의 신용등급 강등(A3→A3-)은 채권 발행의 결격 사유가 아니어서 논란이 되는 등급 강등 인지 시기는 법적으로 문제삼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회생신청 염두에 둔 채 단기채 발행 의혹
1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시중에 발행·유통된 기업어음(CP)·전자단기사채(전단채)·카드대금 기초 유동화증권(ABSTB·자산유동화 전자단기사채) 등 홈플러스 단기채권의 판매잔액은 이번 달 3일 기준 5천949억원에 달한다.
이 중 증권사 일선 지점 등을 통해 개인투자자에 팔린 채권이 2천75억원에 이르며, 중소기업 등 일반 법인에 유입된 채권은 3천327억원이다.
홈플러스 단기채권 대부분이 기관투자자가 아닌 개인 또는 일반법인에 팔린 만큼, 불완전·사기 판매 논란과 함께 법적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업계 우려가 크다.
홈플러스는 지난달 말 신용등급이 'A3'에서 'A3-'로 강등되자 나흘 만인 지난 4일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MBK와 홈플러스는 갑작스러운 신용등급 하락으로 인한 유동성 문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서둘러 기업회생을 신청했으나 사전에 회생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금투업계와 정계에서는 MBK 측이 미리 회생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단기채권을 발행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홈플러스 단기채권은 회사가 기업회생을 신청한 지난달에만 모두 11차례에 걸쳐 1천807억원어치가 발행됐다.
의혹의 관건은 기업회생 신청을 결정한 경위다.
신용등급 강등 뒤 바로 기업회생을 택하는 경우가 매우 이례적인 데다, 복잡한 내부 논의와 법률 서류 준비가 필요한 회생 신청을 불과 나흘 만에 끝냈다는 설명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 의혹 규명 쉽지 않을듯…"회생신청 며칠내 준비 가능"
민주당 김남근 의원은 18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홈플러스 긴급 현안 질의에서 "다른 기업이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법정관리를 신청한 사례를 찾아보면 가장 기간이 짧았던 곳이 웅진으로 2개월이 걸렸고 포스코플랜텍도 강등에서 회생 신청까지 3개월이 걸렸다"며 "다른 기업들과 달리 자구책을 전혀 내놓지 않고 며칠 만에 법정관리를 준비해 신청했다는 주장은 상식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법률 전문가들에 따르면 기업회생 신청을 예측하면서 채권을 발행하는 행위는 형법상 사기와 자본시장법상의 시장교란 행위로 인정돼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홈플러스 단기채권의 발행 주관을 주로 맡았던 신영증권[001720]은 MBK·홈플러스에 대해 형사고발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의혹은 규명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실제 MBK·홈플러스 측이 기업회생 신청을 미리 계획했는지를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기가 어렵고, 급박한 회생 신청도 불가능하진 않아 정황만으로 문제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금융투자 분야에 능통한 한 법조계 관계자는 "법정관리는 채권자의 '뱅크런'(돈 빼내기)을 촉발할 수 있어 매우 급박하게 비밀리에 준비하는 경우가 많고 압수수색으로 이메일과 휴대전화를 털지 않는 이상 이를 언제 논의했는지를 입증하기 어렵다. 회생 신청 서류는 양은 많아도 틀에 박힌 부분이 많아 변호사 인력만 많이 투입하면 며칠 내에 준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설명했다.
◇ 신용등급 강등은 채권 발행 결격사유 안돼
홈플러스 사태 초기엔 홈플러스가 신용등급 강등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함구하고 채권을 발행한 것 아니냐는 질타가 많았다.
그러나 업계 전문가들은 설령 신용등급 강등을 미리 알고 채권을 발행했어도 도덕적 비판의 대상일 뿐 법적 문제는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낮아진 신용등급인 'A3-'도 채권 유통이 가능한 투자적격 등급인 만큼, 강등 자체가 채권 발행의 결격 사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금투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등급이 강등돼 투자·유통 불가 채권이 된다면 문제가 되지만 이번 사태는 이와 무관하다. 다른 경영 지표는 양호하거나 더 좋아지고 있다는 판단 아래 채권을 발행해 사기 판매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다만 신용등급 강등 인지 시기가 앞당겨진다면 기업회생 신청을 미리 검토·추진했을 수 있다는 의혹을 키우는 정황으로 간주될 수 있다.
MBK·홈플러스 측 설명처럼 애초 신용등급 강등이 법정관리를 촉발한 요인이었다면, 일찍 등급이 떨어진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동시에 미리 회생 신청 가능성도 염두에 뒀을 개연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신영증권과 신용평가사인 한국기업평가 대표는 18일 국회 현안 질의에서 MBK·홈플러스가 자금 조달을 앞두고 신용등급 하락 가능성을 알고 있었느냐는 의혹에 관해 모두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 유동화증권 발행 책임소재 불분명 "재판으로 가려야할 문제"
홈플러스 단기채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카드대금 기초 유동화증권'(ABSTB)은 이번 사태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유동화증권의 발행 규모는 4천억원대로 전체 홈플러스 단기채권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문제는 홈플러스가 유동화증권의 직접 발행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MBK·홈플러스가 발행 결정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상품의 구조는 복잡하다. 홈플러스가 물품 결제를 위해 기업용 신용카드를 쓰면, 카드사들은 매출채권(카드 대금)을 증권사가 만든 특수목적회사(SPC)에 매각한다.
SPC는 이 카드대금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삼는 또 다른 채권인 유동화증권을 발행하고, 이어 증권사는 이를 기관·개인 투자자에게 유통한다.
즉 홈플러스는 유동화증권의 출발점이지만 발행·유통 주체는 아니다.
이 때문에 MBK·홈플러스는 유동화증권에 관해 "변제의 최종적 책임은 당사에 있지만, 유동화증권 투자자들이 당사의 직접적 채권자는 아니다"고 선을 긋는다.
유동화증권의 발행·유통을 맡은 신영증권은 홈플러스가 미리 위기 상황을 알려줬으면 아예 업무를 중단했을 것이라며 책임론을 제기하지만 법적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금투업계의 관계자는 "유동화증권의 발행 과정에는 홈플러스, 카드사, 증권사라는 3개 주체가 얽혀있다. 발행의 주 책임자가 도대체 누구인지는 법정 공방 등으로 가릴 수밖에 없는 어려운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유동화증권은 평상시엔 홈플러스, 카드사, 증권사 모두에게 '윈윈'이었다. 카드사는 받아야 할 대금을 빨리 현금화할 수 있고 증권사는 새 금융상품을 유통해 수수료를 벌 수 있다.
홈플러스는 카드를 쓸 자금을 수월하게 조달할 수 있고, 나중에 카드대금을 내면 이 돈이 SPC로 입금돼 유동화증권 투자자가 상환받게 된다.
홈플러스 입장에서 유동화증권은 이중적인 성격이다. 다른 단기채권과 마찬가지인 금융채무지만 물품 구매 대금을 기초로 한 채권이어서 상거래채무 성격도 있기 때문이다.
홈플러스는 기업회생절차에 따라 금융채무 상황은 유예하되 상거래채무는 정상적으로 변제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은 유동화증권을 상거래채무로 인정해줄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유동화증권의 채무 성격은 회생법원의 판단에 달려 있다. 법원 판단 전까지는 상환이 미뤄지는 금융부채로 분류되는 탓에, 투자자들은 돈이 묶이고 차후 상환금액 삭감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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