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처음"…웃음과 눈물 가득했던 쪽방촌 생신 잔치

연합뉴스 2025-03-19 07:00:10

주민 19명 칠순·팔순·구순 잔치…한복 맞춰 입고 뷔페식

"자식들에게 못 받은 대접" "30년 만의 생일상" 눈시울

서울역쪽방상담소가 주최한 생일잔치에 참여한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

(서울=연합뉴스) 이영섭 기자 = "오늘 귀한 날을 맞으신 꽃청춘 어르신들을 모시겠습니다!"

18일 오전 11시 서울 마포구의 한 웨딩홀. 유호연 서울역쪽방상담소장의 소개에 맞춰 한복을 차려입은 어르신들이 잔칫상이 차려진 무대에 줄지어 올라왔다.

알록달록한 이들의 상의 한쪽에는 '칠순 조○○'처럼 나이와 이름이 적힌 핀이 달렸다.

상당수는 어색한 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면서도 생일을 축하해주는 박수 소리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은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830명의 주민 중 올해 칠순·팔순·구순을 맞은 19명을 위해 상담소 측이 신한카드의 후원으로 마련한 잔칫날이다.

몸 하나 간신이 뉘는 한 칸 방에서 10년 이상 지내온 이들이 이날만큼은 널찍한 홀에서 뷔페식을 대접받았다. 이른 아침부터 말끔히 차려입고 각자 기념사진을 찍은 후 초대 가수와 색소폰 연주자의 무대도 감상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한복을 입고 나온 상담소 직원들이 단체로 올린 큰절이었다.

서울역쪽방상담소 직원들로부터 큰절 받는 어르신들

"어르신들, 생신 축하드립니다"는 인사와 함께 직원들이 엎드리자 동료 주민 40여명으로 채워진 객석 곳곳에서 눈물이 터졌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한 주민은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난다"며 "저분들은 이렇게 축하받는 일이 평생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생일을 맞은 어르신들은 연신 상담소 직원들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이날까지 지나온 길을 회상하며 복잡한 심경도 드러냈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생일상을 한참 찍은 후에야 수저를 든 한모씨는 "자식들에게 못 받은 대접을 여기서 받다니, 묘하다"라고 했다.

칠순을 맞은 다른 주민은 "생일잔치를 한 것은 30년 만인 것 같다. 기분이 착잡하다. 이것저것 생각 많이 나지…"라며 허공을 바라봤다.

무대 아래로 내려가 초대 가수 공연을 보던 김모씨는 "이런 자리에 오니 '퇴물'이 된 것 같아 좋지만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무대 위 자리로 돌아가더니 음악에 맞춰 아이처럼 웃고 박수쳤다.

케이크 커팅식에 참여한 쪽방촌 주민들

어르신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상담소 측은 간신히 후원사를 찾은 뒤 동네를 가가호호 방문해 참여를 설득했지만, 주민 대다수가 "평생 처음인데 낯설다", "돈이 많이 들 텐데 미안하다"며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행사 당일 눈이 내리는 바람에 불참으로 마음을 바꾼 어르신도 2명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추억을 안겨드리고 싶다는 상담소 직원들의 진심이 통한 듯 잔치는 흥겨운 박수 속에 마무리됐다.

상담소 유 소장은 "주민들을 위해 이 정도 규모로 잔치를 한 적이 없었는데,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며 "예산을 마련하기가 쉽진 않겠지만, 가능한 한 매년 하고 싶다"고 했다.

행사가 끝나고 주민들이 짐을 챙겨 나갈 무렵. 구순을 맞아 이날 참석자 중 최고령자인 김영호 어르신이 유 소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장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하자 유 소장은 "아유 아닙니다, 저희야말로…"라며 고개를 숙였다.

young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