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은 "헌법파괴", 카터는 "비전제시 못해"…신간 '최악의 대통령'
"인격과 행동은 연결돼 있어…지성, 경험, 도덕성 갖춘 사람 뽑아야"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총명했다. 하버드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책값, 생활비 등이 부족해 휘티어대로 적을 옮겼다. 과일 가게에서 일하려고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고, 늦은 밤까지 공부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듀크대 로스쿨로 진학해 변호사가 됐으며 탁월한 토론 실력으로 하원의원, 상원의원에 잇달아 당선됐다.
그는 매카시즘 열풍을 타고 공산주의자를 저격하며 전국구 정치 스타로 떠올랐다. 부통령을 거쳐 대선에 도전했고, 라이벌 존 F. 케네디에게 간발의 차이로 패했다. 재기를 노리고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갔으나 이마저도 패배했다. 그의 정치생명은 끝난 듯 보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수성가한 이른바 '개천 용'이었고, 끈질긴 생명력의 소유자였다. 다시 정계로 복귀한 그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것도 연달아서. 풍운의 주인공은 리처드 닉슨(1913~1994) 대통령이다.
"어렸을 때 받은 비웃음과 멸시와 푸대접"이 그를 정치계로 이끌었다고 말한 닉슨은 부통령과 대통령을 각각 두 차례씩 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대통령 재임 기간에 매일 12시간씩 일했고,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의 도움을 받아 중국·소련과 잇달아 정상회담을 개최해 갈등을 풀었으며 중동문제와 베트남전 해결에 앞장섰다. 그는 미국 역사상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이 될 뻔했다. 자신의 재선을 위해 야당인 민주당 전국본부 사무실을 도청한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타고난 음모꾼"인 그는 계략에 능했고, 타인을 쉽게 믿지 못했다. 정적을 제거하고, 비판자를 색출하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국세청(IRS) 등 권력기관을 활용했다. 그에게 부정적인 언론을 겁박하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런 비열한 행위와 도덕 불감증은 정치 경력 내내 쌓이고 쌓여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 몰락은 필연에 가까웠다.
퓰리처상 후보로 다섯 번이나 오른 저명한 미국 언론인 네이선 밀러는 신간 '최악의 대통령'(페이퍼로드)'에서 "닉슨은 국가안보를 위한 기구와 조직, 국가의 비밀정보를 국가 방위를 위해 쓰지 않았다. 이토록 중요한 것들을 자신의 사악하고 부도덕한 행위와 실수를 감추기 위한 구실로 악용했다"며 그는 "미국 헌법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려 했었다"고 비판한다.
이어 "닉슨은 능력이나 지성은 우수했지만,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아주 냉소적으로 경멸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한 후 "노골적으로 사법권을 방해하고 헌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최악의 대통령으로 선정됐다"고 덧붙였다.
최근 출간된 '최악의 대통령'은 10명의 대통령을 통해 미국 정치사를 살펴본 책이다. 저자는 '대통령으로 활동하며 국가와 국민에게 얼마나 큰 손해를 끼쳤는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국인을 이끌었는가'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최악의 대통령들을 선정했다. 대상은 제1대 조지 워싱턴부터 제43대 조지 H.W 부시 대통령까지다.
그에 따르면 지미 카터는 도덕적 독선에 빠진 채 미래에 대한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지 못했고, 윌리엄 태프트는 진보의 시대에 보수주의를 고집한 시대착오적인 사람이었으며, 캘빈 쿨리지는 모든 사안에 무능과 침묵으로 대응해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업무조차 수행하지 않았다.
또한 율리시스 그랜트는 무능하고 부정부패의 주범인 친인척의 잘못을 방관했고, 앤드루 존슨은 합의와 타협의 원리를 통한 상생의 정치를 철저히 무시했으며, 제임스 뷰캐넌은 편협한 사고와 이기적인 행동으로 남북 전쟁을 촉발했다.
자신감 결여, 불량한 성격, 타협과는 거리가 먼 형편없는 정치력과 무능, 부정직하고 불성실한 태도, 의사소통의 거부, 비전의 부재, 나쁜 도덕성과 인격 등이 바로 최악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자들의 공통점이다. 그중에서도 인격과 도덕성은 매우 중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미국은 나쁜 대통령과도 생존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인은 지성과 경험은 물론이고 도덕성을 갖춘 사람을 찾아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한다. 인격과 행동은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한 대통령의 인격적 결함은 종종 대중에게 책임이 전가되기도 한다. 리처드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빌 클린턴의 화이트워터 사건(아칸소 주지사 시절 부동산 거래 부정 의혹)은 해당 대통령의 인격적 결함으로 촉발되었다."
김형곤 옮김. 5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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