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워치] 이병철·이건희, 그리고 이재용의 '사즉생'

연합뉴스 2025-03-18 08:00:02

(서울=연합뉴스) 김지훈 선임기자 = 1983년 2월 8일. 삼성의 이병철 창업회장은 도쿄에서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해야겠다"고 반도체 사업 공식 진출을 선언했다. 이른바 이병철의 '도쿄선언'이다.

7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암 수술의 고비도 넘어선 이 회장은 반도체를 '인생 마지막의 전력투구'할 사업으로 선정하고 도전을 시작했다. 이 회장의 3남인 이건희 회장이 1974년 인수한 한국반도체가 성과를 내지 못한 데다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 업체들의 비난과 조롱이 쏟아졌다. 국내외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6개월 만에 반도체 공장을 지었고 세계 3번째로 64K D램을 개발했다. 아시아의 작은 전자회사에 불과했던 삼성은 도쿄선언 10년 만에 메모리반도체 부문 세계 1위에 등극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과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삼성그룹 제공]

1993년 6월 7일. 유럽 출장 중이던 삼성 이건희 선대회장은 '삼성이 일본기업을 베끼고 자만에 빠져 도전을 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서를 읽고 충격에 빠져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내놓는다. 자만과 안일에 빠진 조직을 혁신해 일류로 거듭나야 한다며 특히 불량률 제로(0)를 향한 '품질경영', '신경영'을 주문했다. 휴대전화를 쌓아놓고 불태운 사건은 삼성 임직원들에게 품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충격적인 일화로 삼성의 역사에 각인돼있다.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삼성 '일류 경영'의 밑거름이 됐고 애니콜 이후 열린 스마트폰 시대에 갤럭시의 신화를 창조해냈다.

신경영 선언하는 이건희 회장. [삼성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임원들에게 "삼성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면서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삼성은 임원 대상 세미나에서 '삼성이 안이함에 빠진 게 아니냐'는 외부 전문가들의 지적을 전하면서 위기 극복을 위한 '삼성다운 자세'를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이재용 회장이 생존의 문제로 규정한 '삼성 위기론'에는 일순간의 방심이 초격차의 경쟁력을 위협하는 산업 격변기의 위기의식이 그대로 배어난다. 삼성은 인공지능(AI) 혁명의 시대에 고부가제품인 고대역폭 메모리(HBM) 납품 지연으로 반도체 부문이 경쟁사에 밀리고 있고 TV·스마트폰·D램 등 주요 시장의 점유율도 하락세다.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고 미국의 반도체법 보조금 폐지와 관세부과 움직임도 위험 요인이다.

이재용 회장, 항소심 무죄

삼성의 위기 때마다 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과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소환된다. 시대가 달라졌고 글로벌 경영환경도 바뀌었지만 혁신을 통한 경쟁력 제고와 품질 최우선 법칙은 만고불변의 진리일수 밖에 없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자국경제 이기주의'가 지구촌 전체로 번지고 있다. 대만 TSMC가 나라를 수호하는 호국신산(護國神山)이고 애플이 미국의 자존심이라면 한국 경제에서 삼성전자는 흔들릴 수 없고, 흔들려서도 안되는 기업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고 보면 현 상황이 삼성만의 위기일까. 5명 중 1명이 노인인 초고령사회와 인구절벽 속에서 청년 백수는 120만명을 넘었고 가계부채 비율은 세계 2위를 달리는데 장기 저성장을 뚫어낼 돌파구는 보이질 않는다. 새로 들어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글로벌 무역뿐 아니라 안보까지 위협하며 세계의 질서를 휘젓는 중인데 국내는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사분오열 상태다.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30년'을 피하려면 '사즉생'의 각오가 삼성 임원들에게만 필요한 건 아닐 것 같다.

hoonk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