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한국에는 산이 많아 깊은 계곡의 맑은 물과 샘물이 양질의 '감천수'(甘泉水)로 여겨졌다. 많은 이는 이런 물을 '약수'라 부르며 음료로 사용했다.
또한 자연 상태의 약수와 함께 여러 가지 곡물, 약재, 식용 열매, 꽃과 잎, 과일 등을 달이거나 꿀에 재우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특히 우리나라 전통 음료는 질병을 예방하는 기능에 집중했다. 여름에 더위를 이기고 겨울에는 추위를 극복하는 음료가 발달했다.
조리법도 종류와 형태에 따라 다양하다.
문헌에 나타난 종류도 차, 탕, 장, 숙수, 갈수, 식혜, 밀수, 미수, 화채 등으로 나뉜다.
◇ 자연 재료만으로 만드는 전통 음료
우리나라 전통 음료는 자연에서 얻는 약재나 꽃과 열매로 만들었고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도홍경(陶弘景)의 '본초집경주'에는 "오미자(五味子)는 고려에서 나는 것이 가장 품질이 좋아 살이 많고 시고 달다"고 나와 있어 당시에 수출까지 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영조가 목이 마른 갈증 해소에 오미자탕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승정원일기에도 인조가 병든 신하에게 인삼탕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오미자차로 갈증을 멈추게 하사한 기록도 있다.
한국의 전통 음료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수정과와 식혜다. 수정과는 생강과 계피를 달인 물에 곶감, 잣 등을 넣은 음료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에 등장하는 수정과 종류로는 매화, 유자, 산사(풀명자 열매), 당귀, 오매(검은 매실) 등 다양하다.
이것을 가루로 만들거나 끓여 꿀이나 잣을 섞어 만든 것을 모두 수정과라고 했다. '시의전서'에는 장미화채, 두견화채, 순채 화채, 배화채, 앵두화채, 복분자 화채, 봉숭아 화채, 보리수단 등이 있고 궁중에서 마시는 수정과는 세면(細麵), 화면(花麵), 수단(水團), 화채(花菜), 숙실과(熟實果) 등 그 종류가 더욱 다양했다고 한다.
재료 대부분은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고 저장성이 좋다. 따라서 우리나라 전통 음료는 평소에는 기호식품으로, 경사스러운 날에는 필수품목의 하나며 아침저녁 밥상에는 식후에 주로 마셨다.
이처럼 전통 음료는 향기가 좋으며 효능이 좋은 약재를 쓰고 그 외 각종 계절에 나는 제철 재료를 사용했다.
그중 가장 흔히 사용되는 맥아(麥芽)는 맛이 달고 성질은 따뜻하다. 소화불량, 복부 팽만, 식욕부진, 구토, 설사를 치료하는 효능이 있다고 여겼다. 맥아를 재료로 사용한 식혜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에 마시면 소화에 도움을 줘 명절이나 잔칫날 등에 잘 어울리는 음료였다.
◇ 어머니가 해주시던 식혜의 추억
필자가 어린 시절, 부엌 가득 달큰한 향기가 피어오르면 어김없이 식혜를 만드는 날이었다.
부드러운 온기가 스며든 그 향기는 마치 따스한 품처럼 나를 감싸 안았고, 아궁이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어머니의 손길은 마법과도 같았다.
커다란 가마솥의 뚜껑을 행주로 닦아가며 온도를 가늠하고, 정성껏 엿기름을 우려내는 동안 부엌에는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어머니 곁에 앉아 말동무가 됐고, 어머니는 식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들아, 식혜를 만들 때는 솔잎을 넣는단다. 솔잎은 방부제 역할을 해 식혜가 상하지 않게 해주고, 소화기관을 튼튼하게 해주는 귀한 재료란다."
어머니는 한 조각의 정성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엿기름가루와 찹쌀을 같은 양으로 준비하고, 응달에서 말려둔 솔잎을 한 줌 골라내 달콤한 맛을 더해 줄 신화당을 곁들였다.
커다란 함지박에 엿기름을 붓고 한 시간가량 불린 뒤, 박박 비벼 하얀 물을 체로 걸러냈다. 남은 건더기를 한 번 더 물에 풀어 주물러 걸러내고, 그 맑은 물을 하루 정도 가만히 둬 앙금을 가라앉혔다.
물이 탁하면 한 번 더 걸러야 식혜 국물이 맑아진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가마솥에 엿기름물을 붓고 불을 붙였다.
한편, 찹쌀은 따로 작은 가마솥에 넣어 자작한 물을 부어 고슬고슬한 고두밥을 지었다. 밥을 쟁반에 넓게 펴 식힌 뒤, 다시 엿기름 가마솥에 넣고 10분간 끓였다.
그런 후 아궁이의 불을 낮추고, 숯불과 잔불로 온도를 60도가량 유지하며 여섯 시간 동안 발효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너무 오래 두면 밥알이 녹아버리고, 짧으면 깊은 단맛이 우러나지 않는단다. 불 조절이 중요하단다."
어머니는 한결같은 정성으로 가마솥을 지키셨다. 솥뚜껑을 살짝 열어 밥알이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의 눈빛엔 사랑과 기다림이 깃들어 있었다.
"봐라, 밥알이 떠오르면 다 된 거란다."
나는 숨을 죽이며 솥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별들이 떠오르듯 밥알이 하나둘 둥둥 떠올랐다. 그 순간, 식혜가 완성됐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신화당과 삼베 보자기에 싼 솔잎을 넣고, 아궁이에 장작을 더해 10분간 팔팔 끓였다.
식으면 솔잎을 건져내고, 밥알을 따로 보관한 뒤 식혜를 작은 단지에 부어 식혔다. 부엌을 가득 채운 은은한 단 냄새가 깊고도 따뜻했다. 어머니는 작은 국자로 식혜를 떠 내 손바닥 위에 살짝 올려주셨다.
나는 호호 불어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것은 오랜 시간 정성으로 빚어진 사랑의 맛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어머니의 방식을 따라 식혜를 만든다. 조심스레 엿기름을 우려낸 후 찹쌀 고두밥을 짓고, 보온 밥솥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의 손길이 떠오른다.
주방을 가득 메운 그 익숙한 달콤한 향기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곳엔 언제나 어머니가 계셨고, 변함없는 사랑이 있었다.
한 모금 식혜를 머금을 때마다 나는 그 온기를 가슴 깊이 음미한다. 문득,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 손자병법으로 본 식혜 만들기
손자병법 '구지(九地)의 장'은 전쟁에서 지형의 특성과 병사의 심리를 고려해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을 우리나라 전통 음료 만들기에 응용해봤다.
가장 중요한 점이 산지(散地)다. 산지는 '흩어지는 곳'이라는 의미다. 병사가 쉽게 흩어지니 먼저 결속해야 한다고 했다.
전쟁에서 산지는 아군이 분산돼 통제가 어렵다. 우리나라 전통 음료도 한때는 일상에서 널리 소비됐지만 현대로 오면서 커피와 탄산음료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젊은 세대는 전통 음료를 특별한 날에만 접하며 일상에서 마시는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이처럼 대중과의 연결이 약해진 상황은 마치 병사가 흩어져 전열을 갖추지 못한 산지와 같다.
전통 음료를 현대인의 생활 속으로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는 먼저 소비자와의 접점을 늘려야 한다. 예를 들어 카페에서 전통차를 현대적인 스타일로 제공하거나 젊은 층이 선호하는 디자인과 패키징 도입이 필요하다.
둘째는 '경지'(輕地) 다. 손자는 경지의 상황이 오면 오래 머물지 말고 신속하게 지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는 현대 음료 시장의 빠른 변화와 유행에 해당한다.
전통 음료가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변화하는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경쟁력을 잃게 된다. 식혜가 캔 음료로 개발된 것이 좋은 예다. 식혜가 단순한 가정식 음료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마실 수 있는 형태로 변한 것은 변화하는 시장을 빠르게 지나가는 '경지'의 개념과 같다.
그러므로 전통 음료도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 예로 오매육(烏梅肉), 사인(砂仁), 백단향(白檀香), 초과(草果) 등을 곱게 가루로 만들어 꿀에 버무려 끓였다가 냉수에 타서 먹는 전통 청량음료인 '제호탕' 같은 건강 음료를 여름철 에너지 음료처럼 개발하거나 커피 대용으로 마실 수 있는 전통차 제품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세 번째 살펴봐야 할 요소는 중지(重地)다. 손자는 전략적 요충지는 잃으면 위험하나 얻으면 유리한 곳이라고 했다. 음료 시장에서 전통 음료가 차지해야 할 새로운 자리를 찾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현재 커피와 탄산음료가 주류를 이루는 시장에서 전통 음료는 계절 음료로 남아 있다. 전통 음료는 자연에서 얻는 천연재료로 만들어 건강에 좋다는 강점이 있다.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기호 제품으로 자리 잡는다면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면역력 강화, 다이어트에 좋은 음료로 차별화해 건강 트렌드와 연결하거나 집중력 향상, 미용, 피로 해소에 도움을 주는 기능성 음료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손자가 강조한 '사지'(死地)라는 요소를 눈여겨봐야 한다. 피할 곳이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병사는 필사적으로 싸운다.
우리네 전통 음료가 현대 시장에서 멀어지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만약 변화 없이 전통적인 방식만 고집한다면 전통 음료는 더 이상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지에 몰린 병사가 필사의 각오로 싸워 살아남듯이 전통 음료도 위기를 기회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해야 한다. 예를 들어 K-푸드 트렌드에 전통 음료를 포함해 접목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이처럼 전통 음료는 변화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온고지신이 딴 게 없다. 이토록 경쟁력 있는 우리의 전통 음료를 옛 문헌에 나온 방식으로 잘 연구하면 필경 새로운 길이 또 한 번 열릴 것이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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