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고메스 연출·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생동감 넘치는 화면 돋보여
(서울=연합뉴스) 박원희 기자 = 영화의 기원 중 하나로 거론되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은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1분이 채 되지 않는 분량으로 줄거리라 할 만한 것은 없지만, 상영 당시 관객들이 실제 기차가 들어오는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만큼 시각적 충격이 강렬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후 컬러, 컴퓨터그래픽(CG), 3차원(3D) 가상현실 등 기술 발달에 힘입어 영화는 시각적 놀라움을 선사해왔다. 이야기나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보다 화면을 보며 경험하는 것이 영화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영화 '그랜드 투어'는 그런 인식을 상기시켜주는 작품이다. 3D를 활용한 것도 아니고 장면 대부분을 흑백으로 채웠지만, 시각적으로 매혹하는 영화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1918년 미얀마 양곤에 파견을 온 대영제국의 공무원 에드워드(곤살루 와딩톤 분)가 7년 전 약혼한 몰리(크리스타 알파이아테)가 온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도망친다는 내용이다. 에드워드는 싱가포르, 태국 방콕, 베트남 사이공, 일본 오사카, 중국 상하이 등 아시아 각지를 돌아다니고 그런 그를 몰리가 쫓는다. 내레이션이 이들 여정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 제목 '그랜드 투어'(grand tour)는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절 상류층 유럽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아시아 대륙 횡단 여행을 말한다.
영화는 에드워드와 몰리가 봤을 풍경을 담는 데 주력한다. 기찻길, 태국의 정글, 여러 인형극, 대나무숲 등이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시대적 경계를 뛰어넘는다. 이야기의 배경이 20세기 초인데도 휴대전화, 오토바이, 노래방 기계 등이 등장한다. 에드워드와 몰리의 이야기를 전하는 내레이션과 화면이 전하는 풍경의 불일치는 우리가 보는 게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한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눈앞에서는 생동감 넘치고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진다. 화면엔 생생함이 가득해 실제 그 지역에 간 여행자의 시선에서 체험하는 것처럼 느낄 정도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등 청각적으로 섬세한 연출도 돋보인다. 영화는 마치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끼워서 맞추기보다는, 오감을 열고 경험할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영화는 화면의 생생함에 힘입어 순간순간 여러 감정을 선사한다. 비를 맞으며 격류를 헤쳐 나가는 신부와 일꾼의 모습에선 긴박감이 느껴지고 아편을 피우며 누워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는 이마저 나른하게 한다. 대나무 위에 올라간 판다는 미소를 짓게 한다.
이 영화를 연출한 포르투갈의 미겔 고메스 감독은 프랑스 소설가 서머싯 몸의 여행기를 읽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각본가, 촬영 감독과 각지를 여행하며 직접 촬영한 영상에 배우들과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장면을 더해 이 영화를 완성했다. 고메스 감독은 '그랜드 투어'로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고메스 감독은 "국가, 성별, 시대, 현실과 상상, 세상과 시네마 등 분리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투어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26일 개봉. 128분.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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