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두테르테, 구치소서 화상으로 ICC 첫 출석(종합)

연합뉴스 2025-03-15 01:00:03

변호인 "심각한 건강 문제 앓아"…재판부 "건강·정신 또렷"

1심 개시는 이르면 내년초 예상…'내우외환' ICC 돌파구 주목

화상으로 ICC 첫 출석한 두테르테

(브뤼셀·서울=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이도연 기자 =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반인도적 살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수감된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이 14일(현지시간) 첫 기일에 화상으로 출석했다.

ICC 중계 영상을 보면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네덜란드 헤이그 ICC에서 열린 최초출석 기일에 정장 차림을 한 채 모니터에 등장했다.

최초출석은 예심재판부가 압송 또는 자발적으로 법정에 처음 출두한 피의자에게 기본적인 신상 확인과 ICC 규정에 따른 권리 통보 등을 하는 절차다.

예심재판부는 그가 압송 과정에서 장거리 비행을 한 점을 고려해 구치소에서 화상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심각한 건강 문제'를 앓고 있다는 두테르테 전 대통령 변호인의 주장에 "법원 의료진은 당신(두테르테)이 정신적으로 완전히 또렷하며 건강하다는 견해"라고 일축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약 30분가량 진행된 심리 내내 거의 눈을 감고 있었고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 출생지 등을 영어로 답했다.

로마 규정에 따르면 ICC는 피의자의 최초출석이 끝나면 별도의 재판전 공소사실확인 심리 일정을 잡는다.

공소사실확인 심리는 1심 재판 회부 여부를 결정할 만큼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 등을 판단하는 절차로, 방대한 자료 검토가 필요해 최초출석일 수개월 뒤 열리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1심 재판은 내년 초 이후에나 개시될 전망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도 이때부터는 피의자에서 피고인으로 전환된다. 최종 판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으로 관측된다. 유죄 판결 시 종신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ICC 체포영장 발부에 따라 필리핀 당국 협조하에 지난 11일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체포됐다. 당일 항공편으로 헤이그로 압송, ICC 구치소에 수감됐다.

AP 통신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두테르테 전 대통령 가족과 지인들이 그의 압송을 저지하기 위해 12시간가량 대치하기도 했다. 변호인은 그가 '납치'됐다고 항변했다.

그는 필리핀 남부 다바오시 시장이던 2011년 11월 1일부터 대통령 재임 중인 2019년 3월 16일까지 '마약과의 전쟁'을 명목으로 대규모 살상을 저지른 혐의를 받는다.

마약 복용자나 판매자가 곧바로 투항하지 않으면 경찰이 총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해 용의자 약 6천200명이 사망한 것으로 필리핀 정부는 집계한다. 인권단체는 실제 사망자가 3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해왔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수감된 네덜란드 헤이그의 구치소

두테르테 전 대통령 측은 필리핀 당국이 ICC 체포 영장에 협조한 것을 두고 정치적 배경이 작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때 정치적 동맹이었으나 지금은 갈라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두테르테의 딸인 세라 두테르테 부통령은 "우리 정부가 필리핀 시민, 그것도 전직 대통령을 외국 세력에 넘겼다"며 " 우리 주권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이며 정의가 아니라 억압과 박해"라고 반발했다.

일각에서는 대내외의 압박에 직면한 ICC가 두테르테 전 대통령 사건을 계기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한다.

ICC는 국제적으로 전쟁범죄, 대량학살 등 반인도주의적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할 목적으로 설립됐으나 회원국 협조 없이는 영장 집행이 불가능해 실효에 한계가 여러 차례 노출됐다.

가자지구 전쟁범죄 혐의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이스라엘 동맹인 미국이 카림 칸 ICC 검사장을 제재하기도 했다.

dy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