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밝힘' → 생각·입장 드러내는 표현으로
임신 공개 '임밍아웃'·'덕질' 알리는 '덕밍아웃' 등 '응용'도
(서울=연합뉴스) 오인균 인턴기자 = "비상계엄에 찬성하는지 커밍아웃부터 했으면 좋겠고요."(국민의힘 조경태 의원)
"탄핵에 찬성했던 국민의힘 의원들 모두 커밍아웃하라."(윤석열 대통령 변호사 석동현)
"헌법과 법률을 부정하는 자를 옹호하는 것은 스스로 내란공범이자 반국가세력이라고 커밍아웃하는 것이다."(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의원)
작년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여기저기서 언급된 '커밍아웃'의 용례들이다.
그런가 하면 '임밍아웃', '덕밍아웃' 등의 신조어도 등장했다.
전자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는 뜻이고 후자는 자신이 특정 분야의 마니아가 돼 '덕질'을 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임밍아웃' 해시태그가 41만 개에 달한다.
심지어 '암밍아웃'도 있다. 암에 걸렸음을 외부에 공개적으로 밝힌다는 의미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커밍아웃은 '동성애자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힘'이라고 등재되어 있다.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사전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올라와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커밍아웃이 이보다 확장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대략 생각이나 입장, 상황을 드러내고 밝히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26일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따르면 국내 언론에 커밍아웃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6년 4월 16일 연합뉴스 기사로 검색됐다.
문화비평가 서동진의 책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라'를 소개하면서 커밍아웃의 뜻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감지하고 의미화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다'라 설명했다.
이후 2000년 9월 26일 탤런트 홍석천이 국내 연예인 최초로 커밍아웃하면서 이 단어가 널리 퍼졌다. 같은 해 10월 4일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이 발족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은 원래의 뜻에 국한됐던 커밍아웃이라는 표현은 서서히 정치 성향 커밍아웃부터 비밀을 밝힌다는 의미의 커밍아웃까지 사회적 의미가 확장돼 갔다.
이에 국립국어원은 2023년 12월 표준국어대사전에 커밍아웃을 새로운 표제어로 추가하면서 '자신의 사상이나 정체성 따위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을 뜻한다고 밝혔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당시 회의에서 어원을 밝혀야 한다는 의견이 오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결론적으로 포괄적인 의미로 제시가 된 것"이라면서 "현재 우리 말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커밍아웃이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고 성소수자 인권 단체에서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심기용 활동가는 "성소수자의 권리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성소수자의 경험에서 유래된 말들을 쓴다는 게 위선적"이라면서 "성소수자가 차별적인 시선 속에서 어렵게 커밍아웃한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남웅 활동가는 "적대적 의도를 직접적으로 갖지 않는 이상 단어의 쓰임을 일일이 차별이라고 반박하는 건 효과가 없지만, 사회적으로 취약한 환경에 있는 이들의 언어가 일방적으로 쓰이는 것은 안타깝다"고 밝혔다.
'벽장에서 나온다'(coming out of the closet)라는 문구에서 유래된 이 용어를 다른 맥락에서 사용했을 때 부적절한 사용이라는 것이다.
반면, 커밍아웃을 응용한 신조어를 종종 사용한다는 직장인 임모(28) 씨는 "성소수자의 언어를 빼앗으려는 의도는 아니다"라며 "이 말이 널리 쓰일수록 오히려 커밍아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냐"고 말했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니 이러한 단어 쓰임은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샤이 트럼프의 커밍아웃'도 비슷한 맥락이다"라고 설명했다.
'샤이 트럼프의 커밍아웃'은 미국에서 과거에는 숨어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이제는 숨지 않는 분위기를 뜻하는 표현이다.
앞서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가 2011년 제정한 인권보도준칙 실천 매뉴얼은 "커밍아웃은 성소수자가 자신을 긍정하고 당당하게 성정체성을 밝히는 의미이므로 범죄 사실을 고백하는 표현 등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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