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체자 자녀 국민 아냐"…또 하나의 사회분열 화약고
위헌성 탓 제동 걸렸지만 임기내내 폐지 시도할 가능성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민 규제의 하나로 추진하는 출생시민권 제한이 그렇지 않아도 분열된 미국 사회에 불쏘시개를 더했다.
미국 법원이 위헌적이라고 제동을 걸었으나 트럼프 행정부의 제한 시도가 지속되면서 격론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23일(현지시간) 시애틀 연방법원의 존 코에너 판사는 불법체류자의 자녀에게는 시민권을 자동으로 부여하지 않는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효력을 14일간 정지한다고 결정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 임명된 코에너 판사는 이러한 행정명령이 대놓고 위헌적이라고 판시했다.
이번 결정은 긴급차단 명령에 해당하며, 행정명령 시행을 14일이 지난 뒤에도 계속 막을지 여부는 내달 5일 심리를 통해 결정될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에서는 1866년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미국에 귀화한 모든 사람은 미국과 그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라고 명시한 수정헌법 14조가 제정된 이후 160년 가까이 출생 시민권 제도가 유지돼 왔다.
수정헌법 14조의 제정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뿌리깊은 인종차별을 철폐하려는 노력이 일부 영향을 미쳤다.
남북전쟁(1861∼1865년) 몇 년 전인 1857년 미 연방대법원은 흑인 노예였던 드레드 스콧과 관련한 재판에서 '흑인은 헌법상 시민에 포함되지 않으며 헌법이 시민에게 보장한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는 악명 높은 판결을 내놓았다.
이 판결은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 갈등에 기름을 부었고, 전쟁이 끝난 뒤 미 의회는 수정헌법 14조를 통해 혈통이 아닌 출생지를 기준으로도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미 연방대법원도 1898년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인 노동자 자녀의 시민권을 인정한 이른바 '웡 킴 아크' 판결을 내놓으면서 '출생 시민권'은 오랜 기간 미국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원칙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CBS 방송에 따르면 출생 시민권은 미국만 가진 제도도 아니다.
이 매체는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을 비롯한 미주권의 많은 나라들이 출생지주의를 채택, 자국 영토에서 태어난 아기에게 자동으로 국적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는 이민으로 형성된 이 나라들이 이민자 자녀를 합법적으로 공동체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부터 수정헌법 14조에 따른 시민권 획득은 미국 시민이나 영주권자 자녀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해 왔다. 사실상 출생시민권을 부정한 것이다.
그를 지지하는 보수 진영에서는 출생 시민권은 '전쟁이나 침략'에는 적용되지 않고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는 것은 '침략'에 해당하는 만큼 불법이민자 자녀에게는 시민권을 줘선 안 된다는 논리도 인기를 얻고 있다.
미국 법학자 다수는 행정명령으로 수정헌법 14조를 무효화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 법원과 대법원에 보수 성향 판사를 추가로 임명하면서 꾸준히 출생 시민권 제한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고 CBS는 전망했다.
실제로 불법 이민자 자녀에 대한 출생시민권 제한이 현실화한다면 장기적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일부에서는 노예제 폐지 이전의 흑인처럼 미국 사회 안에 시민권이 없는 소외집단이 생겨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유색 인종 공동체를 특히 표적으로 삼는 이런 정책변화는 (미국 내에 시민권이 인정되지 않는) 영구적 하위계층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에서는 연간 약 30만명의 서류미비(불법) 이민자 자녀가 태어나는 것으로 추산된다. 2023년 기준으로 미국의 신생아 수가 총 360만명이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는 미국에서 태어나는 아기 전체의 8%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CBS는 전했다.
hwangc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