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 팬데믹, 그리고 트럼프…"세계화는 수명 다했다"

연합뉴스 2025-01-24 00:00:21

미국 경제전문기자가 쓴 신간 '공급망 붕괴의 시대'

거리에 진열된 MAGA 모자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자유의 '지니'는 요술램프 속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앞두고 미 의회에서 한 말이다. 클린턴은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 중 하나인 경제적 자유를 수입한 중국이 다시 공산주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WTO가 자유주의와 다자무역을 상징하는 '세계화'의 첨병 기구라는 점에서 중국의 가입은 상징성이 컸다. 전면 개방에 나선 중국은 곧 세계의 공장이 됐다. 노동력이 풍부하고 소비 인구가 많은 데다 생산원가가 저렴하기 때문에 세계의 주요 기업들은 대부분 중국에 제조 공장을 지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오른쪽)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자유무역은 촉진됐다. 애플, 도요타 등 세계적 기업들의 생산설비는 중국에 지어졌고, 이들 공장에 재료나 부품을 납품하는 공장들도 인근 지역에 들어섰다. 중국은 막대한 물품을 납품하고 수출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수출액은 WTO에 가입한 2001년 2천720억 달러에서 20년 뒤 3조5천억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다. 또 세계 에어컨의 80%, 전체 휴대폰의 70%, 태양광 패널의 80%를 생산할 뿐 아니라 항공, 생명공학, 컴퓨터 칩, 제약 등 고급 기술 분야 수출도 갈수록 늘어났다. 팬데믹 이전까지 중국은 실질적으로 '디플레이션'을 전 세계에 수출하는 역할을 했다. 그 혜택은 소비자들에게 돌아갔다.

중국의 한 제조공장

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산 수입품의 증가로 일반적인 미국 가정 소비력은 2000년에서 2007년 사이 2% 높아졌다.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천500 달러 수준이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중국산 제품 덕택에 다양한 미국 상품 가격이 2004년에서 2015년 사이에 해마다 0.19%씩 떨어졌다. 미국 소비자들은 월마트에서 중국산 생산품을 값싸게 구입했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미국 공장의 노동자들은 제조시설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일자리를 잃었고, 중국 공장 노동자들은 사장에게 착취당했으며 사장은 사장대로 월마트 같은 거대 기업에 쥐어짜였다. 세계화는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들었다. 대신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가 2017년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이 같은 세계화에 제동이 걸렸다. 미·중 무역전쟁이 불거지면서다. 게다가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 조처로 생산, 공급, 무역이 '올 스톱'하면서 세계 경제는 멈춰 섰다. 세계 경제는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했는데, 이 체계가 무너진 것이다. 가령 자동차 한 대를 만들려면 세계 여기저기서 만든 개별 부품이 3만개나 들어간다. 이 중 많은 부품이 최종 조립 전에 여러 번 바다를 건너 다른 부품과 결합한다. 만약 이 부품 중 하나라도 구하지 못하면 나머지 작업이 마비되면서 최종 생산이 불가능해진다. 애플은 6개 대륙의 43개국에 있는 공급업체로부터 구매한 부품을 중국과 대만에 있는 공장에서 조립해 완제품을 만든다. 일회용 기저귀 같은 단순해 보이는 제품도 50가지 이상의 재료가 필요하다.

애플 스토어

트럼프 1기와 팬데믹을 거치며 세계화의 시대는 저물기 시작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약 30년간 지속해 온 세계화가 재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세계 제조 수요를 책임지는 공급 총책에서 물러났다. 글로벌 공급망이란 개념 자체도 여러 군데 산재한 지역 허브로 바뀌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이뤄지고 있는 공급망 재편이 끝나고 나면,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국가들은 중국 제조업체의 공급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서유럽 기업들은 동유럽, 튀르키예, 아프리카에 있는 공장에 의존하게 되며 미국 소비자들은 가까운 라틴 아메리카에 밀집한 제조업에 의존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리고 이 같은 '니어쇼어링'(인접국으로 생산거점 이동)이나 해외 생산기지를 아예 본국으로 복귀시키는 '리쇼어링'은 빈번해질 것으로 점쳐진다.

이런 내용을 담은 신간 '공급망 붕괴의 시대'(세종서적)는 트럼프 1기부터 시작된 공급망 재편과 세계화의 변화 조짐을 조명한 책이다. 미국 뉴욕타임스 경제전문기자이자 책의 저자인 피터 굿맨은 꼼꼼한 취재를 통해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화의 종언과 지역화의 대두를 드라마틱하게 그린다.

책에 소개된 대만 반도체 그룹 TSMC 창업자 장중머우(모리스 창)의 발언은 책 전체의 메시지를 관통한다. 그는 2022년 12월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들어서는 반도체 공장 착공식에 참석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화는 이제 수명을 다했습니다."

장용원 옮김. 536쪽.

buff2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