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격차 악화' 우려 낳은 차등 자치법은 국민투표 무산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이탈리아에서 시민권 신청에 필요한 거주 기간을 기존의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는 국적법 개정 작업이 국민의 손을 거치게 됐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20일(현지시간) 국적법 개정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내용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중도 좌파 성향 정당 '+에우로파'의 리카르도 마지 대표는 엑스(X·옛 트위터)에 "엄청난 기쁨"이라며 "매일 이탈리아에 살고, 이탈리아를 사랑하고 건설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역사적인 첫걸음"이라고 환영했다.
야당들과 시민사회단체가 추진하는 국적법 개정안은 시민권 신청에 필요한 10년 거주 요건을 5년으로 단축하고, 이 제도의 수혜자가 자녀에게 새로운 국적을 곧바로 물려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골자다.
집권 우파 정당인 이탈리아형제들(FdI)과 동맹(Lega)이 국적법 개정에 강력히 반대하자 이들은 의회 입법이 아닌 국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며 헌재에 청원했다.
헌재의 이번 결정에 따라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은 법 규정상 60일 이내에 각료회의를 소집해 국민투표 일정을 정해야 한다.
또 국민투표는 각료회의 소집일 기준으로 50∼70일 이내에 치러져야 한다. 일간지 코리에레델라세라 등 현지 언론매체들은 이르면 4월, 늦어도 6월에는 국민투표가 실시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탈리아의 시민권 취득 요건은 유럽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2년에 제정된 현행 국적법에 따르면 비유럽연합(EU) 국적자는 시민권을 신청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10년 동안 합법적으로 거주해야 한다. 이탈리아 영토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부모가 외국 국적이면 18세가 돼야 시민권 신청이 가능하다.
굼뜬 행정 처리 탓에 시민권 취득 절차에 최장 4년가량 걸리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들은 20대 초반에야 비로소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똑같이 정규 교육을 받고 이탈리아어를 모국어로 살면서도 생후 20년간은 법적으로 이탈리아인이 아닌 다소 모순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국적법 개정은 해묵은 과제다. 새 의회가 들어설 때마다 자국 태생 이주민 자녀의 시민권 취득 요건을 완화하는 국적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별다른 논의 없이 사장되는 일이 반복됐다.
이번 국적법 개정 움직임은 지난해 파리 하계올림픽에서 아프리카계 공격수 파올라 에고누 등 다인종·다민족 선수로 구성된 여자배구 대표팀이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며 탄력을 받았다.
국적법이 개정되면 약 250만명의 외국인이 이탈리아 시민권을 얻을 것으로 추산된다.
반면 헌재는 지역 차별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는 차등 자치법에 대한 국민투표 청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는 국민투표의 "목표와 목적이 명확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해 6월 의회를 통과한 차등 자치법 폐지를 위한 국민투표는 무산됐다.
이 법은 지방정부가 원하면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법안이다. 특정 지역의 요구에 따라 자치권의 범위를 차등적으로 확대하려는 취지로 설계된 법안이다.
이를 통해 지방정부는 재정 통제권이 강화되고 보건, 교육과 같은 핵심 공공 서비스에 대해 더 많은 자율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부유한 북부 지역은 자신들이 힘들게 번 돈이 '게으른 남부'의 복지 예산으로 과도하게 쓰인다며 세수를 중앙정부에 덜 이전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이 법안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반면 남부를 포함한 경제적으로 덜 발달한 지역은 이 법안이 지역 간 경제적 격차를 심화할 수 있다며 반대했다. 특히 이러한 지역들은 중앙정부의 국고 보조금이 줄어들어 공공 서비스 제공이 어려워질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야당 또한 이 법안이 남북 간 분열을 조장하고 국민을 '1등 시민'과 '2등 시민'으로 나눌 위험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 법안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켜 지난해 6월 여야 의원들이 법안 심의 과정에서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차등 자치법이 시행되면 중앙정부의 세수가 줄어들어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이탈리아 정부의 재정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의 루카 자이아 주지사는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헌재가 차등 자치권 법안을 폐지하려는 국민투표를 부적합하다고 판결했다. 이제 전진하자"라며 기쁨을 표했다.
역시 북부 지역인 롬바르디아주의 아틸리오 폰타나 주지사는 헌재의 결정을 "역사적 판결"이라고 규정하며 "차등 자치법의 내용이 헌법적 요건을 충족한다는 점을 명확히 인증한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chang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