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말저런글] 민주공화정을 위한 '결단'과 '결딴' 사이

연합뉴스 2025-01-21 07:00:12

자음 하나 차이로 매우 다른 뜻을 나타내는 낱말 중 하나가 결딴과 결단(決斷)입니다. [결딴]은 어떤 일이나 물건 따위가 아주 망가져서 도무지 손을 쓸 수 없게 된 상태 또는 살림이 망하여 거덜 난 상태를 뜻합니다. 목적어 없이 결딴나다, 목적어 동반하여 결딴내다로 각각 사용합니다. [결단]은 결정적인 판단을 하거나 단정을 내림 또는 그런 판단이나 단정이라고 사전은 풀이합니다. 서술할 땐 [결단(을) 내리다] 꼴로 주로 씁니다.

'자칫 잘못하면 민주공화국 헌정체제가 결딴나게 생겼다는 탄식'이라는 표현은 매끄럽습니다. 결딴나다를 부사(副詞)로 벼려서 제대로 꽂은 문장입니다. 그날 밤 국회가 군홧발에 짓밟히는 것을 시민들은 유튜브 생중계로 다 봤습니다. 입법부가 유린당했습니다. 며칠 전 법원은 폭도들의 무법천지 난동에 일순 지옥(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지옥'의 세 번째 뜻, 아주 괴롭거나 더없이 참담한 광경, 또는 그런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으로 변했습니다. 사법부가 유린당했습니다. 학교에서 입헌정치의 기초를 배우길, 정부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등 3부로 구성되어 이들 간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운영된다고 하였습니다. 결딴나게 생겼다는 탄식은, 표현만 매끄러운 것이 아니었네요. 그 뜻은 더욱더 매끄러웠다고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모든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단호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별도의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위헌 위법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하나 되어 규탄하고 재발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외치며 백골단을 국회에 들이고 폭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아스팔트 십자군으로 상찬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피땀눈물로 일군 민주 헌정은 흥정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편을 나누어 누가 이기네 지네 하면서 유불리를 따지는 게임 도구로 다루지 마세요. 공동체를 떠받치는 필수불가결한 가치이자 신념이잖아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요.

헌법의 수호자

결단을 내리는 데에는 결기를 이끌 경구가 도움이 될 겁니다. 독일 루터교 목사이자 반나치 운동가였던 마르틴 니묄러의 통찰입니다. 버전이 여럿 있지만 니묄러 재단이 공인한 시(詩) 전문(이하 졸역)은 이렇습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도,

나는 침묵했다.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다음 노동조합원들을 잡아들였을 때도,

나는 침묵했다.

노동조합원도 아니었기에.

이후,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저항할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과연, 지금 내 일 아닌 게 있을까요. 다 내 일 맞습니다. 남 일 아닙니다. 입법부 이어 사법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습니까. 다음은 어디일까요. 어디가 아니 되리란 법이 있을까요? 짐작조차 하기 힘든 기절초풍할 일들이 꼬리를 뭅니다. 유불리만 따진대도, 체제를 부정하는 특정 지지층의 어긋난 언동에 편승하여 끌려다니기만 해서는 결국에는 유리할 것이 없습니다. 지난 선거의 역사가 증명하잖아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결단을!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마르틴 니묄러 위키피디아 - https://de.wikipedia.org/wiki/Martin_Niemöller (니묄러 시 전문 포함)

2. 네이버 독일어 사전

3.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온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