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필립 K. 딕상, 후보 오른 것만도 일생일대의 사건"

연합뉴스 2025-01-20 00:00:16

세계 3대 SF상 후보…"한국 SF, 자부심 가질 만한 토대 있어"

소설가 정보라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상을 받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요, 후보에 올랐다는 자체가 저한테는 너무 굉장한 일이에요. 일생일대의 사건이죠."

정보라 작가는 이달 15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미국의 SF 문학상인 필립 K. 딕상 후보에 오른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이 상은 매년 미국에서 출간된 SF에 수여하는 것으로, 휴고상, 네뷸러상과 함께 세계 3대 SF 문학상으로 꼽힌다. 후보로 오른 작품은 단편소설집 '너의 유토피아' 영어판('Your Utopia')이다.

정 작가는 책이 미국에 번역 출간된 것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덜컥 큰 상의 후보로 오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지난 11일에 책을 번역해주신 안톤 허 선생님께 이메일로 후보 선정 소식을 들었다"며 "후보에 든 건 안톤 허 선생님의 역량이 90퍼센트"라고 번역가에게 공을 돌렸다.

정 작가는 또 "과거에는 외국어로 번역되는 한국 문학은 대부분 순문학으로 한정돼 있었는데, 한국과 외국 문화를 모두 겪은 번역가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장르를 막론하고 외국에 더 다양한 작품이 소개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너의 유토피아' 영어 번역본과 한국어판

한국의 SF는 서구의 것과 달리 정교한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복잡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인간 존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에 주안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정 작가의 '너의 유토피아' 표제작 역시 기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도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은 전염병으로 인류가 떠나 황폐해진 행성에서 고장난 인간형 로봇 '314'를 뒷좌석에 태우고 목적지 없이 떠도는 스마트 자동차의 이야기다.

자동차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한 건물에게서 "서로의 기계장치를 공유해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확보하며 함께 지내자"고 제안받으나 거절한다. 자신은 느린 존재를 태우고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314의 전력이 떨어져 전원이 꺼지고 다시 충전해 깨어나게 할 방법도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 되자 자동차는 "널 충전할 곳을 꼭 찾아낼 거야"라고 다짐한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고, 전력을 소진하면 마치 죽음처럼 완전한 종말을 맞이할 수 있으며 그것을 피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이 소설 속 기계들은 인간과 닮았다.

정 작가는 "한국 SF는 좋게 말해 인문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과학을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런 점을 한국 SF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짚었다.

그는 "진입 장벽이 높지 않으면서 따뜻한 관점에서 인간성을 성찰하는 SF 작품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며 "한국 SF는 자부심을 가질 만한 충분한 토대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소설가 정보라

1998년 연세문화상에 단편 '머리'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 작가는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호러·SF 소설집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이듬해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너의 유토피아'는 지난해 영문판이 미국뿐 아니라 영국, 인도, 호주에서도 발간됐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 책을 2024년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다.

그런 그에게 차기작 계획을 묻자 정 작가는 "장편을 써야 하는데 고뇌만 하고 있다"며 "매우 괴로워하며 집필하고 있다. 작품이 언제 나올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jae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