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인신매매 허브' 오명 쓴 관광대국 태국

연합뉴스 2025-01-18 09:00:15

국제 범죄조직 납치·유인 경로 활용…초국가적 대응 강화해야

미얀마서 구출된 중국 배우 왕싱(오른쪽)

(방콕=연합뉴스) 강종훈 특파원 = 중국 배우 왕싱(31)은 태국에서 촬영하는 TV시리즈 출연을 그리며 중국 상하이에서 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방콕 수완나품공항에 내린 그가 끌려간 곳은 태국과 인접한 미얀마 미야와디에 있는 중국계 범죄 조직의 온라인 사기 작업장이었다. 그는 삭발당하고 사기 훈련을 받다가 사흘 만에 극적으로 구출됐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벌어졌다는 사실에 자타가 공인하는 동남아시아 관광대국 태국의 명성에도 금이 갔다.

태국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서 외국 관광객 회복세에 미소 짓고 있었으나 또 하나의 대형 악재에 직면했다.

당장 중국에서 태국 관광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하면서 예약 취소가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광은 직간접적으로 태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20%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이고, 외국 관광객 중 중국인 비중이 가장 높다.

왕싱 실종 사건에 이어 유사 사례가 속속 전해지면서 충격을 주고 있지만, 태국은 이미 인신매매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알려졌다.

왕싱이 잡혀간 미야와디 등에는 중국계 범죄조직이 대거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고수익을 미끼로 취업 사기를 벌이거나 인신매매를 통해 모은 사람들을 보이스피싱, 로맨스 스캠(연애 빙자 사기) 등에 가담시킨다.

일부는 몸값을 받고 풀려나기도 하고, 고문과 학대를 받으며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례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태국에서 사라지는 이들은 미얀마 접경 지역인 딱주 매솟 등을 거쳐 범죄 조직의 손에 넘어간다. 이 때문에 태국이 '인신매매 허브'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태국 입장에서는 스스로 피해 당사자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자국 영토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를 방관했거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다.

태국 왕궁 찾은 중국 관광객

태국이 인신매매 문제를 국가 의제로 올려 더욱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밀입국 방지를 위한 철저한 국경 통제, 국경 지역 경찰과 관료 부패 척결, 온라인 사기 조직에 대한 단속과 인터넷 차단 등을 위한 국제 협력 등이 주요 과제다.

랑시만 롬 태국 야당 국민당(PP) 의원은 "온라인 사기를 단순히 다른 나라 문제로 보는 것은 이를 조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태국은 이 문제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미얀마 40곳, 캄보디아 30곳, 라오스 5곳 등 태국 주변 약 75개 도시에 온라인 사기 조직 근거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갈수록 심각해지는 온라인 범죄와 인신매매를 척결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대응이 절실하다.

왕싱 사건을 계기로 뒤늦게나마 중국, 태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이 초국가적 범죄 해결을 위한 공조에 나섰다.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은 16일 동남아 국가들에 온라인 사기 조직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촉구하며 협력 강화를 제안했다.

중국과 태국 경찰은 17일 공동으로 중국인 실종과 관련된 용의자 12명을 검거했다며 지속적인 고강도 단속 방침을 밝혔다.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도 초국가적 온라인 사기에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공동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간 약 4천만명이 태국을 찾는 이유는 아름다운 자연경관, 다양한 문화와 함께 상대적으로 치안이 안전하다는 점이 꼽힌다.

안전한 관광지라는 인식을 잃는다면 동남아 관광대국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

doubl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