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변(詭辯. 속일 궤 말 잘할 변)이 난무하는 시절입니다. 사전은 이 낱말을 철학 용어로 분류합니다. '상대편을 이론으로 이기기 위하여 상대편의 사고(思考)를 혼란시키거나 감정을 격앙시켜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며대는 논법'이라는 풀이와 함께요.
궤변은 교활한 선동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곤 합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극도로 우매한 집단의 광기를 부추겨 체제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논리학의 몇 논법만 갖추어도 궤변을 '순삭'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습니다. 철학과 논리랑 잠시 놀아봅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말하는 이가 여기 있습니다. 이거 맞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그가 속칭 못 배운 사람이라네요. 사람들이 그래서 거짓이라고 수군대요. 배움의 혜택을 덜 받았다 하여 그가 말하는 건 참일 수 없나요? 그이가 덜 배웠다고, 깎아내리려고만 하지 마세요. 참인지 거짓인지는 그것으로 결정되지 않아요. 하루가 멀다고 뉴스에 등장하는 엘리트란 자들이 하는 거짓말들 좀 보세요. 그걸 증명하고 있잖아요.
미국 시트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아시나요? 주인공 호머 심슨은 있지도 않은 스프링필드의 곰 문제를 걱정하여 곰 순찰대를 조직합니다. 심슨은 스프링필드를 돌아보며 만족스레 말합니다. "곰이 한 마리도 안 보이는군. 곰 순찰대가 효과 만점인 게 분명해"라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슨'은 한국에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큰 병 걸리면 기침한다 → A는 기침한다 → A는 틀림없이 큰 병 걸렸다] 이 결론, 참일까요? 거짓입니다. A는 큰 병에 걸렸을 수도,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기침한다고 모든 이가 큰 병 걸린 것은 아니거든요. 대전제가 [기침하면 큰 병 걸린 것이다]가 아니라 [큰 병 걸리면 기침한다]입니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뒤섞는 궤변이 현실에서도 심심찮게 발견됩니다. 속지 않아야 합니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한번은 '신을 믿는 것은 합리적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논증에 맞닥뜨렸다고 합니다. 그는 이 추론을 따르려면 목성 둘레를 도는 주전자가 있다고도 믿어야 한다고 대꾸했습니다. 일종의 논박이겠지요. 그렇게까지 예를 거창하게 들었어야 할까요. 내 집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을 때만 노려서 총각 귀신이 나타난다는 친근한 예시 정도로도 충분하잖아요. 이거 믿어야지, 별수 있나요. 왜냐구요?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없잖아요. 궤변입니다. 증명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확증이 없다면 끊임없이 회의하는 게 바른 태도일 겁니다.
동전을 세 차례 던졌어요. 첫 번째도 앞면, 두 번째 이어 세 번째에도 앞면이 나왔습니다. 네 번째 던지려고 합니다. 앞, 뒷면 중 어느 면이 나올 확률이 높을까요? 뒷면이 나올 때도 되었으니 뒷면 확률이 높을 거라고 하는 쪽이 있을 수 있어요. 흐름을 보면 앞면이 더 나올 테니 앞면 확률이 높을 거라고 하는 쪽도 있을 수 있겠고요. 다 틀린 거 아시죠. 도박사의 오류(Gambler's Fallacy)입니다. 매번, 동전을 던질 때 확률은 2분의 1로 같습니다. 앞선 던지기는 이후 던지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금을 밟다니 나쁜 일이 생길 거야" 하는 식의 미신적 생각을 한다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재미라면 모를까 믿음으론 정말 곤란합니다. 숟가락은 절대로 국 맛을 알 리 없습니다. 내가 맛을 알 뿐이죠. 숟가락이 국 맛을 안다고 우기는 궤변론자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시끄럽기는 또, 엄청 시끄럽습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마이클 위디 지음 한지영 옮김, 『일상의 무기가 되는 논리 수업』, 반니, 2020 (경기도사이버도서관 전자책) - 11%, 24%, 27%, 81%, 94% 대목 서사 인용
2.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러셀 서양철학사』, 을유문화사, 2019
3.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온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