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종우 선임기자 = "용상에서 내려오시지요. 저와 눈높이를 맞추어 얘기했으면 합니다. 이건 부부간의 일입니다." "이래라 저래라, 이젠 이 용상에라도 앉고 싶은 겐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원경>에서 조선의 3대 국왕 태종과 원경왕후 간 살벌한 부부싸움 장면이다. 원경왕후가 태종이 자신의 옛 시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고, 이들을 궐내로 들인 것을 뒤늦게 알고 폭발한 것이다. 과도한 설정이지만 현 시대에 맞춰 변주한 게 흥미 요인이 되고 있다.
원경왕후는 태종의 정비(正妃)이자, 세종의 모후(母后)다. 그녀는 고려 최고의 명문가 여흥 민씨 가문의 수장 민제(閔霽)의 4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원경왕후는 인현왕후(숙종의 계비), 명성왕후(고종의 정비)와 함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조선의 왕비로 평가받는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여흥 민씨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권을 차지하는데 1등 공신이자 여걸이었다. 정도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동생들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하거나, 무기를 숨겨놓고 결정적 순간에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 출전을 독려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태종의 바람기는 특출났다. 후궁을 19명이나 두었고 조강지처의 여종까지 취했다. 내서사 이지직과 좌정언 전가식이 올린 상소문 중에 "전하께서는 성색(聲色·놀이와 여색)을 즐겨 하심이 여전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태종과 원경왕후가 여자 문제로 다퉜지만 '금슬'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과 원경왕후는 슬하에 8남 4녀(4명은 요절)를 두었다. 원경왕후는 만47세인 1412년(태종 12년)에 마지막 왕자(요절)를 낳기도 했다. 이는 동생인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비명횡사한 지 2년여 뒤의 일이다.
권력은 냉혹한 현실이다. 태종은 보위(寶位)에 오른 뒤 처가를 도륙했다. 자신을 위해 선봉에 섰던 처남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귀양 보낸 뒤 사약을 내렸다. 그 아랫동생들인 민무휼·민무회도 유배 보낸 뒤 교수형에 처했다. 외척의 발호는 태종의 경계 대상이었다. 처가의 권력 팽창은 왕권의 약화를 의미했다. 그 정점에 원경왕후가 있었다. 드라마에도 나오듯이 태종은 원경왕후와 처가의 도움이 없었으면 대권을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태종은 앞서 정도전의 '재상정치론'에 반발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바 있다.
태종이 처가와 며느리 집안을 '멸문지화'(滅門之禍)에 몰아넣으면서까지 정권의 기반을 다져놓았기에 성군(聖君) 세종대왕이 등장해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태종은 당대에 '비정한 군주'라는 오명을 무릅쓰고 왕권과 후대를 위해 '외척 리스크'를 제거한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대통령의 처가는 정권의 위기를 불러오는 위험 요소이자, 좀처럼 풀기 어려운 난제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랬고, 윤석열 대통령도 부인과 처가 문제에 발목이 잡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처지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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