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는] ⑼반듯한 국경선…140년전 베를린회의 '상처'

연합뉴스 2025-01-18 00:00:35

아프리카 지도

(서울=연합뉴스) 노재현 기자 = 50여개 국가가 모인 아프리카 지도에서 직선으로 뻗은 국경선을 많이 볼 수 있다.

여러 국가의 경계가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점이 흥미로운데 이면에는 아프리카의 비극적 역사가 있다.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대륙을 경쟁적으로 침탈하는 과정에서 현재 국경선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국경선에 얼마나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두고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커다란 요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19세기 후반 펼쳐진 아프리카 쟁탈전의 결정적 계기가 이른바 베를린회의다.

이 회의는 1884년 11월 15일부터 1885년 2월 26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진행됐다.

독일의 초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회의에서는 아프리카의 식민지 분할 방식이 논의됐다.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스페인, 미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 오스만제국(튀르키예의 전신) 등 14개국 대표단이 참석했다.

대륙의 운명이 정작 아프리카인들을 배제한 채 서구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 셈이다.

베를린회의는 식민지를 둘러싼 열강 간 충돌을 막기 위한 자리였다.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중부 콩고 분지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벨기에 등 다른 국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식민정책의 방향성을 놓고 긴장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영국은 북쪽 이집트와 아프리카 남부를 식민지로 연결하려는 종단정책을 편 데 비해 프랑스는 식민지를 알제리부터 동쪽으로 확장하는 횡단정책을 추진했다.

회의를 거쳐 발표된 합의문에는 아프리카에서 토지를 실효적으로 점유할 경우 다른 열강에 이를 통보하고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때문에 서구의 '아프리카 땅따먹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콩고강 유역 등에서 유럽 열강의 자유로운 무역에 관한 원칙도 규정됐다.

또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베를린회의의 승인으로 콩고자유국을 세워 사유지로 삼았다.

서구 열강은 베를린회의 이후 불과 20여년 만에 거대한 아프리카를 대부분 점령했다.

베를린회의 전 1884년만 해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럽 국가들이 점령한 지역은 남단과 북단을 중심으로 10%가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회의를 거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땅의 약 90%를 통제했다고 한다.

아프리카 서부에 미국으로 끌려갔던 흑인 노예들이 세운 라이베리아와 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친 에티오피아만 간신히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

현재 아프리카 국경선은 역사, 언어, 종교 등 문화적 특수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예컨대 아프리카 동부 소말리족은 소말리아, 케냐, 에티오피아 등 여러 국가에 흩어져 있다.

결과적으로 내전 등 분쟁의 씨앗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반도도 해방 후 미국과 옛소련에 의한 38선 남북 분단으로 6.25 전쟁까지 이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베를린회의가 유럽의 탐욕을 그대로 보여주고 아프리카에 되돌리기 힘든 역사적 상처를 남겼다는 비판이 1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noja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