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목, 공수처·경호처 무력충돌 우려에도 끝내 결론못내
최규하, 서울의봄 당시 정승화·신군부 사이에서 눈치보기
이승만 하야 후 허정 권한대행, 국정공백 적극 수습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윤석열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공수처와 경호처 간 무력 충돌이 우려되던 시간,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면 엄중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경고문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결국 양측에 책임이 있으니 '알아서 잘들 해보라'는 태도와 다름 없었다.
최 대행은 앞서 국회 몫 헌법재판관 3명의 임명 문제를 두고도 알쏭달쏭한 메시지를 발신하다 여야 몫 각 1명을 임명하는 절충안을 냈다. 재판관 임명 문제를 도로 국회에 떠넘긴 한덕수 전 대행에 비하면 진일보하긴 했다.
▶ 두 대행의 이런 행보는 서울의봄 당시 최규하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로 총리에서 권한대행이 된 그는 12월6일 간선제 대통령에 오른 지 엿새 뒤 군사반란 사태를 맞았다.
최 대통령은 12·12 사태 당일 밤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한 뒤 재가를 받으러 온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제지하지 않고 노재현 국방장관의 승인을 받아오라며 시간만 흘려보냈다. 노 장관은 공관 주변에서 총성이 나자 현재 대통령 관저 주변인 단국대 캠퍼스로 피신하는 등 도피를 이어가다 신군부에 붙잡혔고, 최 대통령은 그제야 정 총장 연행을 재가했다.
최 대통령은 신군부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에 나섰는데도 무기력하게 지켜만 봤다. 유혈 참극으로 얼룩진 광주로 내려가선 한 일이라곤 "일시적 흥분으로 총을 든 시민들은 총기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담화문을 낸 게 전부였다.
▶ 이들과 달리 대한민국 최초의 권한대행인 허정 과도정부 수반은 욕먹을 각오로 주어진 임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위기 수습의 책임을 맡은 허 대행은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한다"면서 장관 임명권 행사로 내각을 채우고 반공주의 천명으로 이념 대결을 차단했다.
▶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 활동하는 상태를 유체이탈이라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자신이 관련된 얘기를 마치 남 얘기하듯 하는 태도를 의미하는데, 한덕수 전 대행과 최 대행의 행보가 딱 그렇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나중에 책임이 따르는 문제 앞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결론을 미루는 결정장애는 제왕적 대통령제와 여야 정쟁 프레임에 갇힌 우리 고위 관료들의 고질병이라 할 수 없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더라도 권한대행은 국정 공백 상황을 관리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게다가 천운이 따라야만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무엇이 그리 두렵고 아쉬워서 저자세를 보이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책임 회피의 핑계인 '기계적 균형'으로는 국가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 이제라도 소신을 펼쳐 후배 공복들의 귀감이 되기 바란다.
ja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