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샷!] "참사 한달, 심장마비처럼 심리적 기능 마비"

연합뉴스 2025-01-16 07:00:10

제주항공 참사 후 유족 등 수백명 트라우마 지원센터 찾아

"트라우마 바로 치료해야 만성화 예방…한달이 골든타임"

기체 바라보는 유가족

(서울=연합뉴스) 이승연 기자 = "참사를 겪은 후 한 달은 심장마비와 같이 심리적 기능이 마비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혼돈의 시기이자 가장 안정이 필요한 시기입니다."(석정호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179명의 희생자를 낳은 제주항공 참사가 발생한 지 2주가 넘은 가운데 트라우마 치유의 필요성이 재차 강조된다.

16일 국가트라우마센터에 따르면 지난달 30일부터 운영된 제주항공 참사 통합심리지원단이 접수한 심리상담 건수는 13일 기준 총 670건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뿐만 아니라 사고 현장에 투입된 경찰·소방관, 시신 인도 등 수습 절차를 도운 현장 종사자, 추모객 등이 하루 평균 약 44.7명씩 상담을 받은 셈이다.

트라우마란 일반적인 스트레스의 범주를 넘어 충격적·압도적 경험으로 사람의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사건을 의미한다.

유가족 위해 마련된 통합심리지원단 센터

의료계에 따르면 참사 직후 한 달 동안 나타나는 혼란, 불안, 수면 장애 등은 과도한 스트레스에 대한 일종의 방어 활동으로 정상적인 신체 반응이다.

대표적인 트라우마 반응은 사건에 대한 반복적 회상·악몽, 심리적·신체적 고통과 같은 재경험, 사건과 관련된 장소·사람에 대한 회피, 과도한 죄책감 및 수치심, 과민성·공격성 증가 등이 있다.

전문가들은 이 한 달의 기간이 트라우마 반응 만성화를 예방할 수 있는 '골든타임'으로 보고 있다.

석정호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 골든타임에 '심리적 응급처치'(PFA)가 시행돼야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PFA는 트라우마나 위기 사건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제공하는 인도적, 지지적, 실질적 지원을 말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를 참사 직후 시행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PFA의 행동원칙은 '3L'을 기반으로 한다. 주변 상황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관찰하기(Look), 경청하며 공감하기(Listen),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하기(Link) 등을 말한다.

석 교수는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핵심"이라며 "후유증을 최대한 줄여가면서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고 했다.

트라우마에 대한 대표적 정신질환인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도 사건 발생 한 달 후까지 공포감, 불안감을 느끼는 등 일상생활이 어려울 경우 진단 내려진다.

하얀 눈에 덮인 조화

전문가들은 트라우마에 대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정신질환으로 이어지는 걸 예방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트라우마를 겪어 불안을 호소하는 가족 혹은 친구가 있다면 지지와 공감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현주 한림대성신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감정은 피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며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도록 잘 소화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라고 하기보다 '불안할 수 있어'라며 지금 느끼는 감정 반응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알려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갑작스러운 사고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안전한지, 인간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며 "언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회복을 촉진한다"고 했다.

국가트라우마센터 애도상담프로그램 워크북은 건강한 애도를 위해 ▲ 울고 싶을 때 울기 ▲ 가족·친구와 솔직하게 대화하기 ▲ 도움을 요청하기 ▲ 필요한 도움을 받아들이기 등을 실천하라고 조언한다.

백 교수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면 감정을 더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 더 건강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이러한 사건을 다시 겪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족 혹은 친구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주는 게 가장 회복적"이라고 했다.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 기자회견

유족 등에게 위로를 전할 때는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섣불리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흔히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하는 말은 갑작스러운 사고사를 당한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보다 상처가 될 수 있으며, 경청해주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인 위로가 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백 교수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 '산 사람은 살아야죠'와 같은 말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의 고통을 몰라주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며 "'나'를 주어로 얘기하기보다 고통을 겪은 이들이 얘기할 수 있도록 끌어내는 게 좋다"고 했다.

폭설 내리는 제주항공 사고 현장

트라우마 반응이 일어난다면 발견 직후 치료해야 후유증을 줄일 수 있다. 다만 개인마다 증상 발현의 속도, 치료 속도는 다르다.

홍 교수는 "시간이 지나면 트라우마 반응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며 "트라우마를 스스로 재경험하고 해석하는 기회가 많아져야 증상이 완화하며, 그에 드는 시간은 저마다 다르다"고 했다.

2차 가해가 이뤄지는 온라인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있다.

백 교수는 "시간을 정해놓고 뉴스를 보는 등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피하는 게 좋다"며 "일에 집중하거나 산책을 하는 등 일상 루틴을 지속해야 한다. 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했다.

winkit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