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학살로 유도하는 인지적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계엄과 관련해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까지 가결된 상황에서 계엄과 관련된 지시에 복종하는 행위는 위법한 것이라 생각한다."(12·3 비상계엄에 반발해 사직한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위기 상황에 군인들은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한다."(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주목받은 두 인물의 발언은 지시나 명령이 부당하거나 불법적이라고 판단될 때 공직자나 군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관한 인식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사의 비극에 가담한 이들도 '명령에 대한 복종'을 명분으로 내세운 경우가 많았다. 이는 르완다나 캄보디아의 대량학살 가해자와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이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적인 변명이다.
인지신경과학자인 에밀리 A. 캐스파는 신간 '명령에 따랐을 뿐!?'(동아시아)에서 인간이 명령에 복종하는 인지적·심리적 메커니즘에 대한 규명을 시도한다. 저자는 학살 사건 가해자를 인터뷰하고 여러 실험 결과를 검토한다. 또 드물지만 박해와 폭력의 표적이 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의 사례도 살펴본다.
아쉽게도 실험에서 부당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책에 따르면 저자는 실험실에서 8년 동안 타인에게 (안전한 수준이지만) 고통을 주는 전기 충격을 가하라고 피험자에게 명령했는데 4만5천 건의 명령 가운데 거부된 것은 약 1천340건(약 2.97%)에 불과했다.
책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핑계를 대는 것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문제가 된 행위에 대한 책임과 해명을 회피하려는 시도라고 지적한다. 이런 태도가 드러난 악명높은 사례로는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을 단죄하기 위해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나치 고위 간부들이 "명령은 명령이다"(Befehl ist Befehl)라고 변명한 것을 꼽을 수 있다. 나치 장교들은 총통이 내놓은 원칙에 복종했을 뿐이므로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논리를 폈다.
르완다의 가해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투치족을 죽이라고 훈련시킨 나쁜 정부 때문이다", "나는 명령에 따랐다", "나는 정부의 명령에 복종했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와 같은 반응을 반복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인간의 뇌는 타인의 고통을 정서적으로 처리하고 이해하도록 설계돼 있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조절할 수도 있다고 책은 설명한다. 연구에서는 피험자의 공감 능력이 실험자가 독려하는 방향에 따라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집단학살을 명령하는 자들은 여러 선전을 통해 '우리'(가해 집단)와 '그들'(피해 집단)의 차이를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해 집단에 대한 공감을 약화하고 그들을 인간이 아닌 짐승과 같은 존재로 왜곡한 셈이다.
책은 타인을 해치지 않기 위해 불복종(친사회적 불복종)을 선택하는 소수에도 주목한다. 핵심은 역시 공감 능력이지만 불복종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메커니즘을 규명하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저자는 인류사의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처벌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심리적 기제를 알아야 한다는 관점을 취한다.
"집단학살을 저지른 자의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단학살을 저지르는 데 이바지하는 무의식적 신경 활동 같은 복잡한 역학을 이해하기 위해 섬세한 학제 간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략) 예방의 열쇠는 이해다."
이성민 옮김. 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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