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폭탄주 연대기

연합뉴스 2025-01-14 00:00:26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주간으로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막걸리와 증류식 소주를 섞는 혼돈주(混沌酒)

'폭탄주'(爆彈酒·bomb shot)라 하면 보통 알코올도수가 강한 술이 담긴 작은 잔을 그보다 도수가 약한 술을 담은 큰 잔에 빠뜨려 만드는 '칵테일'(cocktail)을 말한다.

맥주에 스카치위스키를 빠뜨린 영국의 '보일러 메이커', 기네스 흑맥주에 아이리시 위스키와 베일리스(Bailey's·1974년 아일랜드에서 개발된 도수 17%의 세계 판매량 1위 리큐르) 혹은 깔루아(Kahlua·멕시코 베라크루스주에서 생산되는 커피 리큐어 브랜드로 럼, 설탕, 아라비카 커피가 들어 있음) 등 크림 리큐르를 섞은 '아이리시 카밤', 예거마이스터(Jagermeister·독일에서 56가지 허브와 향료로 만든 술)를 레드불 같은 에너지 음료에 빠뜨린 독일의 '예거 밤', 아마레토(이탈리아 증류주로, 살구나 아몬드로 만들며 달콤한 맛이 특징)나 바카디 151에 불을 붙여 맥주에 빠뜨린 미국의 '플레이밍 닥터 페퍼', 맥주에 사케를 빠뜨린 일본의 '사케 봄바', 보드카와 맥주를 섞은 러시아의 '요르시', 맥주에 희석식 소주를 빠뜨린 한국의 소맥 등 폭탄주는 세계에서 보편적 음주 문화다.

즉, 맥주나 다른 음료에 높은 도수의 술을 섞어 마시는 방식은 술이 있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서나 있는 술 문화 중의 하나다.

좌측부터 베일리스, 깔루아, 예거마이스터, 아마레토

최근 미국에서 유행 중인 폭탄주가 있는데 동영상 소셜미디어 틱톡 등에서 '필름 끊기게 달리는 술'(정신을 잃게 하는 분노의 갤런)이라는 뜻의 축약어 'BORG'(보그·Blackout Rage Gallons)다.

이 폭탄주는 1갤런(약 3.8L) 생수병에 물을 절반만 넣고 나머지를 보드카 1병, 에너지음료, 숙취해소제로 채워 만든다. 도수 높은 술의 향과 맛을 에너지음료로 희석해 인기가 좋다.

그런데 이 생수통의 폭탄주를 벌컥벌컥 마시다 병원에 실려 가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CNN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보그주 한 병에 미국 성인 권장 1회 알코올 섭취량의 약 17배에 달하는 알코올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보그(BORG)주

영국 폭탄주 보일러 메이커는 산업혁명 시기의 영국 술집에서, 퇴근한 노동자들이 싼값에 빨리 취하려고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 마신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폭탄주를 언제부터 마셨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보통 두 가지 이상의 술을 섞어서 만든 술을 '혼양주'(混釀酒)라고 불렀는데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유럽의 주정강화 와인(Fortified Wine·와인에 브랜디를 첨가해 알코올 도수를 높인 와인)과 유사한 '과하주'(過夏酒)로 청주에 소주를 섞은 것이다.

하지만, 과하주는 폭탄주라기보다는 청주의 보관 기간을 늘리고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과하주 외에 우리나라 폭탄주로 '합주'(合酒) 라는 술이 있다. 합주는 문헌상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술로 추정된다. 술을 발효시키고 난 후 청주와 탁주를 따로 분리하지 않고 그대로 섞어 마신 술로 조선시대에는 상류층이 즐겨 마시던 고급술이었다. 이 술은 다른 말로 '혼돈주'(渾沌酒)라고 불렀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또 다른 '혼돈주'(混沌酒)와는 발음만 같고 한자나 만드는 방법은 전혀 다른 술이다. 합주를 현대에 재현한 술이 배혜정도가의 '부자 10'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합주를 재현한 '부자 10'

위에 언급한 후자의 혼돈주(混沌酒)는 소주와 탁주를 섞었다.

이것이 사실상 조선시대 진정한 폭탄주다.

조선시대의 탁주는 현대의 탁주와는 다르게 물을 섞지 않은 원주 상태라 보통 10도 이상이었다.

당시의 소주가 30도 정도였으니 둘을 섞으면 그 도수는 제법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837년에 나온 책 '양주방'에 보면 혼돈주에 대해 '따뜻한 막걸리 한 사발에 소주를 한 잔 붓고 소주가 맑게 위로 떠오르면 마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섞은 소주가 진도 홍주나 감홍로 같은 붉은 색일 경우는 이 술을 '자중홍'(自中紅)이라고도 불렀다.

이 혼돈주는 그 도수가 높다 보니 심지어 살인의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정조 6년(1782년) 전북 남원 갑부의 차남이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하려고 밤새 장남에게 혼돈주를 권해 결국 죽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천재 실학파 학자인 석치(石癡) 정철조(1730∼1781)도 1781년에 혼돈주를 많이 마셔 사망했는데 연암 박지원은 석치를 위해 혼돈주의 위험성을 알리는 제문을 짓기도 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막걸리 한 말과 일본 기린 맥주 한 병을 섞은 '비탁'(맥주 Beer의 일본식 발음인 '비루'와 탁주를 합친 단어)이란 폭탄주가 유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배워 비탁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의 비탁 레시피는 막걸리 한 말(약 18L)에 기린 맥주 2병(약 1.2L)을 타는 것이었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 각종 다양한 폭탄주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폭탄주가 주목받는 이유는 폭탄주 자체보다는 충성주, 회오리주나 폭탄주 이모 등 폭탄주 제조를 위한 퍼포먼스가 눈길을 끌어서일 것이다. 또, 폭탄주 이름에 사회적 이슈를 반영하거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주와 맥주를 섞은 술 '갓생폭탄맥주'

MZ세대를 위해 아예 소맥이나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은 폭탄주가 공산품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편의점 GS25가 하이트진로와 손잡고 지난 2022년에 선보인 소맥 폭탄주 '갓생폭탄맥주'는 출시 후 50만캔 가까이 팔렸다.

국순당도 같은 해에 롯데칠성음료와 함께 국순당 막걸리에 사이다를 조합한 '국순당 칠성막사'를 내놓은 후에 한 달 만에 약 25만캔을 팔았다.

블랙핑크 멤버 로제가 보그 유튜브에 출연해 만들어 먹었던 소맥으로 이래저래 'K-리큐르'는 전국구를 뛰어넘어 세계화를 향해 나아갔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하긴 조선시대부터 폭탄주를 혼돈주, 혼양주, 합주 등의 이름으로 마셔온 민족이니 놀랄 일도 아니지만.

해외 매거진에 등장한 소맥 관련 기사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